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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평 詩]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하다’ / 방민호

문근영 2013. 10. 24. 12:48

 

[월평 詩]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하다’ / 방민호
[59호] 2013년 03월 01일 (금) 방민호 rady@snu.ac.kr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컨텍스트에 관한 성찰이 필요한 때

신비평주의는 텍스트에서 작가를 추방하려고 했다. 사실 그것이 지금도 정답일지 모른다. 누가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를 소포클레스를 알고서야 명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 점에서 시는 소설이나 희곡과 다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소설이나 희곡보다 시는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메신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르인 것 같다. 이백이나 두보의 시를 꼭 편편이 시인의 이름을 알고서야 그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산섬 달 밝은 밤에〉라는 시조가 빛날 수 있겠으며, 황진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어저 내일이야〉에 흐르는 심경 세계가 남달리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때로는 메시지만큼이나 메신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빛 좋은 시들이 많은 시점에서는 시의 옥석을 가리는 데 그것을 쓴 사람의 인생이 중요한 몫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귀결점은 무엇일까. 모두들 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피해야 한다면, 시의 진정성 같은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쓰는가. 이 시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이 물음을 거쳐 나온 시라야만, 시가 시답게 보일 것이며, 또 그래야만 시가 기계제 대공업의 산물인 듯한 홍수 사태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환유가 시대적 특질을 드러내는 장면

서유미라는 작가가 있다. 연배에 비해 아직 신인이다. 이 작가가 최근에 작품집을 냈다. 《당분간 인간》이라는 것이다. 당분간은 인간에 대해 생각하겠다는 것인지? 그런데 이 당분간이 언제까지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번 인간에 빠진 작가는 인간적인 것 바깥의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창작집의 첫 수록작은 〈스노우맨〉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퍼붓는다. 덕분에 교통이 전부 두절된다. 교통만 두절된 게 아니라 아파트 현관 바로 앞까지 눈이 차올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하루 이틀 참아준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삽을 들고 출근을 시작한다. 삽으로 눈을 퍼내며 회사를 향한 출근 노역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으로 향하는 길은 멀다. 정오가 지나도록 그는 회사에 가닿지 못한다.

 

노역을 거듭해 가는 눈밭에서 웬 휴대전화 소리가 울린다. 그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눈을 파헤친다.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 사람은 그와 반대로 회사에서 유능한 인재 소리를 듣던 자다. 바로 이 사람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다. 폭설을 뚫고 출근하다 그만 눈에 파묻혀 쓰러진 것이다.

 

재미있다. 이 작가는 기교가 있다. 기교는 한낱 기교인 것이 아니라 기교가 곧 사상이기 때문에 눈여겨보게 된다. 이번에 박성우 시인 시 가운데 그런 것이 있다. 꼭 ‘스노우맨’ 같은 ‘넥타이맨’이 시에 등장한다.

늘어지는 혀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었다

사내는 초침처럼 초조하게 넥타이를 맸다 말은 삐둘어지게 해도 넥타이는 똑바로 매라, 사내는 와이셔츠 깃에 둘러맨 넥타이를 조였다 넥타이가 된 사내는 분침처럼 분주하게 출근을 했다

회의 시간에 업무보고를 할 때도 경쟁업체를 물리치고 계약을 성사히킬 때도 넥타이는 빛났다 넥타이는 제법 근사하게 빛나는 넥타이가 되어갔다 심지어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풀었을 때도 넥타이는 단연 빛났다

넥타이는 점점 늘어졌다 넥타이는 어제보다 더 늘어져 막차를 타고 퇴근했다 그냥 말없이 살아 넌 늘어질 혀가 없어, 넥타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차창에 비치는 낯빛을 쓸어내렸다 다행이 넥타이를 잡고 매달리던 아이들은 넥타이처럼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귀가한 넥타이는 이제 한낱 넥타이에 불과하므로 가족들은 늘어진 넥타이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 박성우 〈넥타이〉(《애지》 2013년 봄호)

여기서 ‘넥타이’는 물론 샐러리맨의 특징적인 일부를 이룰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환유다. ‘모자’가 환유가 되듯이, ‘견장’이 환유가 되듯이 여기서는 ‘넥타이’가 환유적 기능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환유일 뿐만 아니라 ‘혀’가 되기도 한다. “늘어지는 혀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었다”.

 

이제 혀가 넥타이다. 우리는 너무 힘들면 혀가 쑥 나온다. 혀를 입속에 긴장한 채 담아두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살아갈 힘이 있어서다. 이 힘이 빠지면 혀조차 늘어짐을 면치 못한다. 사내의 목에 둘러쳐진 넥타이는 날이 가면서 낡아간다. 늘어져 버린다. 혀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관이다. 늘어질 혀조차 없는 사내에게 넥타이가 매달려 늘어진다.

 

넥타이는 때로 멋져 보인다. 그러나 샐러리맨의 목에 둘리고 가슴 밑으로 흘러내린 넥타이는 정말 혀 같을 때가 있다. 혀를 빼물고 다니는 현대의 셀러리맨들을 보면 때로 그 규격감에 신물이 난다. 이 시는 그 느낌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신물이 나면서도 안쓰러운 넥타이들. 그들은 이제 빌딩 위에서 지상의 시위대를 향해 휴지 두루마리조차 던져주지 않는다.



편지 대신 부치는 시의 아름다움

때로 시인인 나는 내 가장 귀한 사람들에게 편지 대신 시를 쓰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중한 사람들에게 쓴 편지들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이들은 남자였고, 편지를 쓰려 할 때 나는 여자가 되곤 했다. 나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가 되어, 당신이 왜 내게 그토록 소중한지, 당신이 떠나간 후 내가 얼마나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러고도 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지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백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것들은 지금 내 거처 어딘가에 불완전한 형태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극진한 사랑의 시간이 흘러가 버렸으므로 그것들은 이제 완성될 수조차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 사랑에서 성실한 것은 지성에서 일관된 것처럼 끔찍하다는 것이다. 지순한 사랑이라거나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지루하고 비개성적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얼마나 무감각한 사람인지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지성세계에서도 똑같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식인이 하나의 사상을 굳게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게을러빠진 삶의 표현이겠느냐는 것이다. 이 경직됨에는 매력적인 요소란 찾아보려 해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신용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이미 그 렇게 하고 있다. 나는 옛날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아 항로 없는 여행을 떠나 버렸다. 옛사랑은 잊히고 새로운 사상의 매력에 빠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변화무쌍한 존재이기에 고백을 완성하는 것, 편지를 완성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여울 속에 든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어 올라 햇빛에 그 은빛 지느러미가 반짝 하고 빛나는 순간이다. 사람의 감정이 바야흐로 가장 아름답게 완성되어 이제 곧 스러져야 할 운명에 처한 때다. 다음의 시는 그와 같은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자꾸 꿈에 아버지의 등이 보인다고 한다.

버스 정거장까지 나와 오랜만에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돌아온 밤 쓸쓸한 얼굴로 돌아서던 굽은 등이 자꾸 보인다고 한다.

갑자기 외국 비행기 속에서 죽은 동생의 얼굴도 자주 보여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니 삶이 부질없다는 허무감이 비쳐 들어오는 밤, 무엇보다 아버지의 등이 보이는 밤은 술 한 잔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목구멍으로 자꾸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한시 만 편을 읽어도 꿰뚫지 못했다는 삶의 이야기에 아버지 등이 실려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로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고독한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고 느꼈다
— 최동호 〈아버지의 등―심경호 선생에게〉(《시인수첩》 2013년 봄호)

‘아버지의 등’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심경호 선생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부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시로 하여금 사신(私信)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이어서, 이 사신을 시라는 한결 공적인 형태로 일반 독자들에게 공표하는 숨은 뜻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시를 쓴 사람도, 사신 형태의 이 시를 받게 되어 있는 사람도 모두 공부하는 사람이며 오랜 시간을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아마도 그들은 평소에 데면데면한 듯 지나쳐 다녔을 수도 있다.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확인하지 못한 채, 마치 계용묵의 〈붕우도〉라는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를 꺼리면서, 그럼에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오래 품어 왔는지도 모른다.

계용묵의 〈붕우도〉에 나오는 그 화자의 친구가 누구인지는 지금 자세히 살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잊혔다. 그 소설 또한 사신과 같았건만, 지금은 이 작품에 관련된 많은 사실이 소실되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만 작품 속에 남았다.

 

그와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두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생각하는 그 ‘등’의 이미지만은, 또 그 이미지를 떠올리는 화자의 심경만은 작품 속에 오롯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을 사랑하던, 그 고조된 화자의 마음 세계만이 시에 남아 훗날의 독자들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계속 제자리에 있다

옛날에 박노해 시인이 문명을 떨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 이것 역시 오래된 소식이지만, 그는 제3세계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는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반에 얼굴 없는 혁명 시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 그가 1980년대에 엮어냈던 《노동의 새벽》(1984)을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이 사실 또는 진실의 제시 기능에서는 뛰어났을지 몰라도 무엇이 시인가 하고 물을 때 어딘가 불충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후 백무산이라는 이름이 노동자 시인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1990)를 읽고는 그 ‘선동적인 면’에서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더 차분해 보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인간의 시간》(1996) 쪽으로 움직여 갔다. ‘노동’에서 ‘인간’으로 나아갔다고 해야 할까? 노동문학이나 노동자 시인이라는 말이 한때의 유행처럼 실효성을 상실한 뒤 '인간’으로 나아간 그의 움직임은 그럼에도 재빠르거나 눈치 빠르게 보이지 않았다. 시에 나타난 시인의 내면이 그 성찰 과정이 성실했음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떤 시를 쓰는 것일까? 오랜만에 최근 잡지에서 접한 그의 시는 부조리한 현실 구조에 다시 한 번 관심을 돌리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가)

가난한 그들에게 먹을 걸 주려면
많은 걸 차지해야 한다

힘없는 그들에게 힘을 주려면
많은 권력을 움켜쥐어야 한다

가엾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려면
죄를 감형할 감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백무산 〈그들에게 자비를〉(《신생》 2012년 겨울호)

(나)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기도의 덕을 본 사람들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빵을 위해 싸우지만 그 빵을 먹은 자들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싸우지만 가난한 자가 자유롭게 되지 않도록 싸운다

그들은 굶주려 국경을 넘는 자들의 등 뒤에서 총을 쏜다 위대한 조국을 탈출한 그들을
—백무산 〈조국은 위대해서는 안 된다〉(《신생》 2012년 겨울호)

잡지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에는 여행지를 다룬 것도 있었다. 아마 위에 인용한 시들도 여행지에서 얻은 생각을 시로 옮긴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가 지칭하고 있는 “그들”은 누군가?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지배계급인가? 권력자들인가? 성직자들인가? 가난하고 힘없고 가여운 이들은 유사 이래 시대와 지역을 망라해서 어느 곳에나 있었다. 또한 이들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이들, 복지의 땅을 약속하는 이들도 언제나 있었다. 그것은 먼 대륙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바로 “그들”의 ‘지배’ 아래서 살아간다.

나는 두 시에서 화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렇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것이 어쩐지 부담스럽다. 시가 경구가 되고 표어가 되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까? 시는 경구나 표어도 될 수 있고, 황지우 시에서처럼 벽보의 글귀나 심인광고가 그대로 시가 되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시는 다시 한 번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됐다. 송경동 시인 같은 시가 그래서 주목받기도 한다. 부조리한 것을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중하다.

 

그런데 어떤 부조리는 시로써 고발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또 요즘 같은 시대는 분명 옛날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백무산의 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애써 잊어버린 척했던 일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것이 어두웠던 과거 시대의 일이든, 시의 방향에 관한 일이든.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풍경

김주대라는 시인은 제멋에 산다. 최근에 《그리움의 넓이》라는 새 시집을 펴냈다. 이번이 세 번째 시집쯤 되든가?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자기 시 세계를 열심히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한때 학원을 운영해서 나쁘지 않았었다는 살림살이가 지금은 아주 엉망이 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수선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라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아직 꺾이지도 꺾을 수도 없는 기가 살아 있다. 그래서 시인이라면 으레 진지한 말들이 오가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진담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기인스러움이 있다.

 

시를 쓰면서 사진에 빠져 있기도 해서 어디 자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자기만 즐기는 방식으로 사진도 찍고 시도 붙이고 글도 붙이고 하는데 아직 충분히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최근에 아주 오랜만에 포장마차에서 세 사람이 소주에 황태구이와 ‘뼈 없는 닭발’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 기가 어딘지 조율이 되어 보이는 면이 없지 않았다. 안경알 너머로 자그마한 눈은 그때는 과장 없이 순수하게 반짝이고 생활의 회계에 지친 나머지 멋진 차는 어디로 가고 음주운전 할 생각도 없이 한밤에 바람처럼 왔다 헤어졌다. 그런 시인이 발표한 시 가운데 이런 것도 있다.

차가운 콘크리트 기둥 아래
청소부가 몰래 들어와 빗자루를 안고 쪽잠을 잔다
햇살이 침입자를 감싸주고 있었다

가스총을 찬 경비 아저씨가 달려오다가
멈칫 서더니
슬그머니 되돌아간다
— 김주대 〈모르는 척〉(《시와문화》 2012년 겨울호)

김주대 시인 이름이 없었다면 옛날 이시영 시인 풍이라고 할 것 같은 시다. 이런 시를 쓰는 사람들은 대개 출퇴근이 일정치 않고 기약도 없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특히 새벽 같은 때까지도 술을 마시고 남들 출근할 때 퇴근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정하게 리듬을 맞춰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잘 보지 못하는 현장을 날렵하게 포착해 내기도 하는 법인데.

 

위의 시가 바로 그렇게 해서 그가 짊어지고 다니는 카메라 렌즈에 잡힌 한 장면이라 할 것이다. 카메라 렌즈에 잘 포착된 풍경은 선경후정 식의 부가적인 진술이 없이도 정서적인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차가운 콘크리트 기둥 틈바구니에서 빗자루를 안고 잠을 자는 청소부. 그는 햇살을 찾아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못 본 척 돌아가 버리는 경비원. 우리는 여기서 삶의 고단함을 달래려는 심사와 그것을 슬쩍 감싸 안는 인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카메라는 과연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카메라로 하여금 장면에 감춰진 것까지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시인의 의식일 텐데, 이것이 장면에 밸 만큼 쓰는 것은 포착하는 능력 이상의 여유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소품인 것인지? 그가 요즘 쓰고 있는 시들을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쉬운 시를 쓰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이수산이라는 시인을 나는 모른다. 2007년에 등단했고, 2007년에 서정시학에서 《차향》이라는 시집을 펴냈다고 한다. 《시와문화》에서 이 시인의 시를 접하기 전에는 비록 내가 《서정시학》 편집위원이라 해도 생면부지의 시인이었다.

 

그런데 잡지에 실린 시들을 읽어가다 보니 시 안에 펼쳐진 세상이 유난히 맑고 밝게 느껴지는 시가 바로 그의 것이었다. 요즘 시들이 얼마나 어둡고 괴로운가. 대개는 그렇다. 우리 현대인의 삶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에서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시들은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노년과 고독과 죽음을 다루는 것들이 많다. 그것이 요즘 시의 대세라면 대세다. 그런데 이수산이라는 시인의 시들은 그와는 왠지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시는 어떤가.

네비게이숀을 산과 하늘로 정하고
가자는 대로 가 봐
들꽃에서 벌어지는
벌 나비 잔치를 만날 거야
그들의 희열을 너도 느껴봐
물안개 핀 숲으로 빨려 들어가면
바람의 날개가 너를 감싸 안을 거야
무거운 옷 훌훌 벗어 던지고
아름드리 굴참나무에 연인인 양 기대 앉아
휘파람을 불어봐
푸른 커튼 하늘거리는 곳에서 산새인 듯
노래를 불러봐
다람쥐가 놀란 눈으로 쳐다봐도 못 본 체하고
하늘을 쳐다봐
구름 속의 꽃들도 신명이 나 있을 거야
— 이수산 〈문을 열어봐〉(《시와문화》 2012년 겨울호)

이런 시가 쉽게 쓰인 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삶에 눈뜰수록 생각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저 김기택 시인이 노래한 쉰 살처럼 탁하고 찜찜하기 때문에 투명하고 밝은 시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시를 쓰려면 마음이 먼저 그 수준에 바싹 다가서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마음만은 그 삶에서 훌쩍 벗어날 수 있도록 단련된 사람이어야 쉽게 쓰인 것 같은 맑은 시를 우려낼 수 있다.

삶은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는 삶이 희로애락의 애환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안다. 희로애락이라고 말해 놓고 나면 그 네 글자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들어 있건만, 우리는 어쩐지 그 안에 그런 것들은 없고 노여움과 슬픔만이 가득한 것처럼 생각하고는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마음에서 패배했고,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좌절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로잡히면 안 된다. 노여움에, 슬픔에,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 생명이 살아 있음을, 그것이 하나의 기적임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니체적인 명랑함(Die Heiterkeit)으로 가득찰 때 우리는 시간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시간의 압력을 견뎌내며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네비게이숀”을 “산과 하늘”에 맞춰 보라. 그러면 우리는 이 약동하는 자연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의 환희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내비게이션에 대한 유머를 알고 있다. 그녀가 가라는 곳으로 따라갔더니 벼랑 끝이더라는 것이다. 그녀가 그 순간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깝다. 보내버릴 수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마음의 내비게이션은 이렇게 괴기스럽거나 잔인하지 않을 것이다.

 

방민호 rady@snu.ac.kr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ㅡ출처:『유심』(2013. 4)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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