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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조] 물의 기억, 가볍거나 무거운 / 염창권

문근영 2013. 10. 24. 12:46

시조] 물의 기억, 가볍거나 무거운 / 염창권

 

 

 

봄은,
봄은 단지 물방울을 가볍게 띄워 올리는 데서 출발한다. 물은 봄의 힘이다. 2월에 봄을 예감하는 것은 뿌리에서 빨아들이는 물기의 힘 때문이다. 물방울(droplet)만큼 가변적인 것은 없다. 무정형의 이들은 에너지를 이동시키며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비로소 4월이 되서야 지난 3월에 충전되기 시작한 햇빛의 기운을 받아 본격으로 물이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가벼워진 물방울은 뭇 생명의 핏속에 스며든다. 4월을 지나지 않고서는 생이 분출되는 기쁨을 맞이할 수 없다. 물이 본격적으로 불과 만나기 시작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몸에 저장된 물이 가연성이 되면서 몸이 충동질을 할 때다. 이 가연성의 강도는 물과 불이 어떻게 혼합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빗소리 변주變奏>는 가변적인 물의 기억을 보여준다.

   
최오균 시인
시서늘한 방에 누워 빗소리 바라보면

해 뜨고 달이 지고 바람이 지나는 걸

그러네, 그런 것들이 눈에 밟혀 삼삼하네.

아스팔트길 걸으며 빗소리 만져보면

해 삼키는 어둠이 머리 위 얼킨 구름이

아 글쎄, 그런 것들이 아리송해 보이네.

왕소금 소낙비가 지상으로 떨어지고

조약돌 부딪치며 물소리 ‘쏴아’ 지르면

한 때의, 울음과 웃음 얼싸안고 스러지네.

최오균 <빗소리 변주變奏>(《시선》 2013년 봄호)

화자는 “시서늘한 방”에서 “아스팔트길”로, 마침내는 조약돌이 구르는 “지상”의 길로 중심 이동을 한다. 빗소리를 보거나 만지는 등의 감각 지각을 동원하여 현상의 너머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즉, 몸의 감각을 빌려줌으로써 삼삼한 기억과 아리송한 현존의 상태, 그리고 “울음과 웃음”이 얼킨 것들이“얼싸안고 스러지”는 생의 현존을 감각 가능한 실존태로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해 뜨고 달이 지고 바람이 지나는” 세월과 “한 때의,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시간으로 확장되는데, 순환하는 빗방울을 향해 몸 통로를 개방함으로써 생애에 관한 몽상이 분출되는 것이다.

이 시조에서 화자의 거처는 “시서늘한” 감촉을 느끼는 계절과 방이다. 각 수의 종장마다 “그러네,” “아 글쎄,” “한 때의,”와 같은 영탄부를 두는데, 이러한 전환점을 통해 해와 달, 바람의 세월 속에서 물방울로 떠돌다가 비가 되어 스러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생의 현존에 대비시킨다. 즉, “빗소리 변주”는 빗소리를 통해 생애의 내력을 은유하면서 현존을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향해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조에 나타나는 물의 관념은 불의 에너지가 내장되지 않는 무거운 물이다. 그것은 “시서늘한 방”이라는 거처와 “한 때의,”라는 종결사로 증명되거니와 낭만적인 하늘의 구름보다는 점차적으로 중력에 의해 추락하면서 스러지는 소멸의식에 근원이 닿아있다. 이 경우에는 웅덩이에 고인 나르시시즘적인 물에 대한 응시라기보다는, 분자화된 물의 상상력에 해당한다. 시간의식은 순환론에 닿아 있으며 물방울은 공간적으로 이동한다. 삼삼하고 아리송한 물의 감각을 내세우는 것은, 현존을 안개와 같이 무정형의 거처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물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조로 <가을 동강>과 <적寂> 등이 있었다. 이를테면, 김정숙의 <가을 동강>(《문학의 오늘》 2012년 겨울호)에서 “나,/ 여기 흐르는 것을/ 강이 잠깐/ 불렀네.”라고 했을 때, 흐름을 멈추고 자기응시의 시간을 요청하는 것이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자기응시의 모습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이미지라고 하였다. 산과 물이 상호 반영의 상태일 때, 이 양자를 분별하는 일은 우주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주체가 강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은 이 우주적 공간 안에 방기된 스스로를 향해 대화를 건네는 일이다. 김영주의 <적寂>(《문학사상》 2월호)에서는 물의 축축함 속에서도 기화(氣化)되는 사랑의 행적을 보여준다. “잠자리 두 마리가 장대 같은 빗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비를 잊고 있었다”에서 한 쌍의 잠자리는 물의 폭력 아래 무방비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트 모양으로 끌어안고 장대비를 맞는 것은 이 조그만 생명체 속에 차가운 물을 이기는 불의 힘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간이/ 전 생애인 것처럼/ 소지燒紙 올리듯” 타버리는 것은 사랑 혹은 본능의 힘이다. 그러기 위해서 피에는 충분한 양의 불이 섞여 있어야 한다.

불이 용해된 액체의 대표는 술과 우유이다. 증발하는 물을 모아둔 ‘술’은 음료 중에서 잉여 가치가 높아서 신을 부르거나 스스로를 탕진하고 덜어내는데 쓰인다. ‘우유’는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어머니의 젖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출생과 양육의 순간을 환기시킨다. 그러기에 인간은 쓰디 쓴 출생의 기억을 멀리하고, 성장하면서 ‘술’의 잉여를 탐닉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두 번째 탯줄을 끊는 일과 같다. 나이가 들면서 성장의 신화보다는 소멸의 신화에 노스탈쟈를 느끼는 것이다. 우유가 생을 지상에 안착시키는 무거운 물에 해당한다면, 술은 인간이 소멸을 향해 눈길을 줄 때 그 걸음을 가볍게 띄워준다. 이 양자는 쌓이는 물의 무거움과 연소되는 물의 가벼움 간의 대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저장소

무의식의 연원에는 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모든 기억은 물을 질료로 삼는 저장소를 두고 있다. 인간의 뇌를 담고 있는 그릇은 호두껍질처럼 생겼는데 이 속에는 점착성의 용액이 담겨 있다. 무의식에 근원을 둔 욕망이 끈적거리는 것도 이 저장소의 특성 때문이다. 학습이론에 따르면 모든 기억은 망각되지 않으며 단지 인출과정에서 실패가 있을 뿐이다. 가령, 술에 진탕 취한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이 까마득하더라도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성가시게 구는 친구가 하나씩 되짚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그랬지”와 같은 고개 끄덕임이 있다. 그러다가 불확실한 기억이 조합되면서 일정부분 왜곡된 어느 날 밤의 사건이 완성될 것이다. 장기기억은 점착성의 용액 속에 흔적을 남기며 보존되는데, 그 가운데 심리적 외상으로 설명되는 기억은 강렬한 무의식적 충동질을 동반한다. 이 충동질은 너무도 강하여 가끔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면서 신병(神病)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을 동반한다.

<통증클리닉>은 실존의 외로움으로 인해 나타나는 통증의 문제이다.

   
박해성 시인
*
바닥 모를 심해에서 당신이 떠올랐다.
나는 또 그날처럼 잔기침을 누르는데
‘외롭다’ 물 위에 쓴 글 목젖에 걸린 고래처럼

*
무작정 멀리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지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거든
아파요? 김 서린 창에 흘려 쓰던 낯선 남자.

대답 대신 눈물짓는 유리창만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잠들었지
넓은 어깨에 스르르
환절기 잔설이 녹는 전생의 국경을 넘고

쇳소리 된기침에 선뜻 내민 흰 손수건, 속이 텅 비었나봐요
난 실없이 웃었지만
아파요? 많이 아파요? 가늘게 떨리던 손말手話

*
언제부터 그랬을까, 역마살 도지는 날엔
다음 생에 다시 만나 못다 한 말 하겠다던
제 울음 잃어버린 새, 허공을 자꾸 맴돈다

박해성 <통증클리닉>(《비빕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리토피아, 2012)

이 시조는 모두 세 부분으로 분절되어 있다. 각 부분은 자체적으로 의미가 완결되었다가 다시 전체적으로 통합된다. “① 외로움→ ② 낯선 남자의 손말→ ③ 다음 생의 약속”과 같은 의미의 궤적을 보이는데, 주체의 외로움이 타자의 존재적 외로움과 충돌하면서, 지상의 존재로서의 숙명적 얼크러짐을 야기한다. 문제는 나의 외로움보다도 “손말(手話)”를 하는 “낯선 남자”의 외로움을 각인하게 되면서 외로움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실존적 고독이 보편적 감수성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우선 “바닥 모를 심해”는 무의식의 연원을 떠올리기에 족하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근원이 “당신”일까. 당신은 나보다도 실존적 고독에 침잠되어 있는 상태로 오히려 내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당신은 “아파요? 김 서린 창에 흘려 쓰던” 단독자일뿐이다. 단지 그는 “아파요?”하는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도, 이 질문 하나로 “대답 대신 눈물짓는 유리창만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잠들었지/ 넓은 어깨에 스르르/ 환절기 잔설이 녹는 전생의 국경을 넘고”와 같은 치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어서 “속이 텅 비었나봐요”에서 자가진단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실존적 공복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체의 실존적 공복감은 공감을 통해 연대할 대상의 부재를 암시한다. 이후로 다시 “역마살 도지는 날”이 찾아오는데, 이 실존적 고독 혹은 궁핍은 소통되지 않은 감정의 질곡 때문이다. 그래서 “손말”을 하였던 당신이 심해에서 떠오르고, “제 울음 잃어버린 새”를 연민과 공감으로 허공 중에서 불러보는 것이다. 그게 일상이 아닌 환몽일지라도, “당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질퍽한 감정이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통증은 실존적 공허에서 유발되므로 공감의 힘만이 클리닉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 “당신”의 손말은 “제 울음 잃어버린 새”의 몸짓에 불과하지만 그 몸이 만드는 말이 화자의 외로움을 텅텅 울리게 하면서 치유의 단서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들 멈춰서 어깨를 빌려주고 싶지 않을까. 타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위안을 주는 바 크다. 이때 화자는 잠시간의 꿈을 꾸는데, 그 사이에 “전생의 국경을 넘”고 “다음 생”마저 기약을 한다. 찰나 속에 우주적인 시간이 풍족하게 넘치는 것이다.

박해성 시조의 특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바이지만 막힘없이 풀리는 걸쭉한 이야기의 힘에 있다. 이는 삶의 역정을 바라보는 눈이 녹록하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즉 막힘없이 쏟아내는 말의 힘은 그의 장점이지만, 자칫 가볍게 풀어버리는데서 오는 율격적 이완에 주의해야 할 터이다.

흔적

물이 물질적 원소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면, 집과 가구는 공간을 점유하면서 삶의 애환을 지각 가능한 상태로 돌려놓는다. 생의 기록에서 집만큼 구체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집의 구성 요소 중에서도 가구는 인간적인 특성을 반영한다. “사람은 가도 가구는 남는다(피천득 <가구>)”는 말이 있듯이 생의 내력을 기록해주는 필사자이다. 가구 중에서도 방의 공간을 가장 많이 점유하는 대표적인 것이 장롱이다.

집의 은밀(隱密)은 장롱 속에 담겨진다. 장롱이 없는 방이라면 아무리 장식이 뛰어나더라도 일단은 사무실 냄새를 풍기게 된다. 사생활의 은밀함을 넣어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부부나 가족의 은밀하고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는 곳이 장롱이다. 일단 오래 간직해야할 것들은 모두 장롱 안에 보관된다.

방의 은근함에 비하면 주차장은 형편없이 폭로되는 노골적인 장소이다. 여기에 장롱이 주차되어 있다고 한다. 아래 시조 <자리>에서는 직사각형의 주차선 안에 방치된 장롱에 주목한다.

   
김남규 시인
주차장 실선 따라
장롱이 주차되었다
의문에 부친 내부
상상을 채워간다
집밖의 살림살이는
제 용도를 잊는 법

폭설의 밤을 지나
장롱이 주차되었다
부적이 밀어냈는지
단층(斷層)을 이루는 문
밀폐에 실패한 틈새로
찬바람이 인다

맨땅만 주차된 아침
장롱이 사라졌다
점선으로 떠올리며
자리를 그려본다
당신은
그렇게 왔다 갔다
여전히
그렇다

김남규 <자리>(《유심》 3월호)

이 시조에서 장롱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폐기되기 위해 잠시간 주차장에 놓여 있다. 정지된 차량처럼 이동의 당위성마저 확보하고 있다. 밀폐된 내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롱은 그 부피만큼이나 삶의 우여곡절을 암시한다. 그런데 화자의 시선이 굳이 장롱에 머무는 것은 집안에 붙박여 있던 살림살이가 주차장에 정렬되면서 떠남에 대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수와 둘째수의 초장은 동어반복이라 할 만큼 부조리한 장롱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현재 장롱은 위험한 상태이다. 자동차와 같은 바퀴가 없으므로 실려 가기 위해 폭설의 밤을 견뎌야 하는 수동적인 처지이다. 궁금하였던 내부도 밀폐에 실패하면서 “단층(斷層)을 이루는 문”과 같이 허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롱이 사라졌다”고 한다. 장롱이 사라지고 난 뒤로, 화자에게 그 빈자리가 공복감을 가져오는 것은 “당신” 역시 부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용도에 맞지 않게 장롱이 주차장에 머물렀다 떠나간 것처럼, “당신은/ 그렇게 왔다 갔다/ 여전히/ 그렇다”고 한다. 여기서 폭로되는 바, 장롱의 “의문에 부친 내부”나 “단층을 이루는 문”이 “당신”에 대한 환유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신”은 한 번도 집안에서 용도에 맞게 머무른 적이 없다. 즉 당신의 “자리”는 늘 부재의 영역 표시일 뿐이다.

시조 <자리>의 연과 행 배열에서 셋째수 종장을 제외하고 구와 행을 일치시키고 있는데, 직사각형의 주차 실선과 직육면체인 장롱의 형상을 연상시키려는 패이지 구성으로 읽힌다. 그러나, 율독이 방해받은 만큼 이미지의 환기력이 높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라고 본다. 내용과 형식은 상호 함축적이므로 어느 한 가지 의도만으로 통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장롱에 비해 “집”은 영역 개념을 보다 확실히 한다. 이동하기보다는 고정된 공간 좌표 내에서 정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려준다. 시간성과 장소성이 결합된 인격화된 대상이 집이다. 공간의 인식 가운데서 집처럼 구체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행복의 공간’으로 규정하고, 볼노프는 ‘피호성(被護性)의 공간’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모두 집이 가지는 따뜻한 모성적 가치와 보호 내지 비호의 기능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래의 시조 <겨울 숲>에서는 자족적 기능을 상실한 퇴락한 집을 불러낸다. 제목이 “겨울 숲”인 까닭은 어수선한 집안의 형세를 병치시키기 위함이다.

   
이송희 시인
빚더미에 눌려서 주저앉은 지붕 아래
노모의 혼잣말이 저녁밥을 짓는다
혹여나 흩어질세라
눈물 꾹꾹 눌러 담고

삭정이 같은 다리, 칭칭 감는 바람과
세평 남짓 방안에 떠도는 안개들
더듬어 헤매던 날들에
진눈깨비 날린다

울음조차 잊어버린 전화통을 바라보는
주름진 눈망울에 하루해가 저문다
죽은 지 오래된 시계
담벼락이 무너진다

이송희 <겨울 숲>(《열린시학》 2012년 겨울호)

위의 시조에서 “집”은 노모의 몸과 등가적으로 연결되는 신체성을 지니고 있다. 집은 한 여성의 신산스런 삶을 내포한 채로 인격화되면서 몰락의 지점에 있다. “빚더미에 눌려서”, “삭정이 같은 다리”, “울음조차 잊어버린”과 같은 각 수의 상황 설정은 보호성의 가치를 상실한 집의 모습이자 노화된 모성의 표정을 동시에 함축한다.

이 시조의 의미 구조는, ‘① 독거노인의 일용할 양식→ ② 헤매던 날들→ ③ 무너지는 담벼락’과 같이 전개되는 바, 노모의 생이 어렵게 풀린 것은 운명론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진눈깨비”의 날들은 스스로에게 허여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강박적으로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송희 시조의 특징은 타자체험의 양상을 공감각적인 언어사용을 통해 "내력(來歷)의 서사”로 풀어내는 데 있다. 이로써 그의 시 문법(poetry grammar)은 서사 단위를 완성하는데 바쳐진다. 이에 비해 <겨울 숲>은 퇴락한 신체성의 집에 내력의 헌사를 모두 할애한다. 의미화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겨울 숲”의 황폐함이 전경화 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의 세계관이 소외된 삶에 맞춰져 있을지라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닌 이상에는 외부고발자일 따름이다. 타자체험 양상이 내부자시선을 확보하려면 대상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이미지와 진정성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고민이 따라야 한다. 이는 모두가 유념해야할 문제이다.

가벼워짐을 위하여

흔히 우리의 시단이나 시조단에서 제시하는, 물이나 기억에 관한 상상력은 생의 중력에 압도당하여 무력한 상태이다. 낮아진 채 밑으로만 흐르려고 한다. 인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에 치우쳐 있다고 본다. 이는 우리 민족정서의 한 특성일 수 있다. 가벼운 물은 폭소나 유쾌함을 동반할 터이다. 희극은 봄의 정신인데, 상상력으로써 생을 가볍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이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가 풍자나 해학이라고 했던 것도 리얼리즘에 기댄 것이지 실제로 ‘가벼운 들뜸’은 아니었다. 생의 중력을 초극하는 상상력의 즐거움을 또한 만나보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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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
gilgagi@hanmail.net / 1990년 〈동아일보〉(시조), 1996년 〈서울신문〉(시)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햇살의 길》 《일상들》 등과 평론집 《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다.

출처 : 함시 복수초
글쓴이 : 김정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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