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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41) 생의 전모에 대한 통찰 - 아쟁을 타고 가는 나타샤 / 김재근

문근영 2013. 10. 16. 02:50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41) 생의 전모에 대한 통찰

아쟁을 타고 가는 나타샤
 
김재근
 
나타샤를 태우고 나의 태양은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요람은 이미 뜨거워 타오르는데
뒤척일 때마다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후생으로 뛰어내려
 
눈을 가리고
죽은 새의 언어를 모두 이해할 때
내게 전생은 물속 같아
그림자 같아
식은 입술 같아
누구도 만질 수 없는데
 
수면 위를 걷는 그림자가
물 밑에 두고 온 자신의 울음소리 같아
입을 벌리면 검은 밤이 쏟아져
 
이런 밤이 저절로 떠가고
고양이가 날아가고
접시가 날아가고
행성이 저물고
오늘밤,
언니들은 울어야만 해
 
비눗방울이 아름다워
눈동자에 피어나는 장미넝쿨,
컴컴한 장미의 눈 속으로 기차는 달려오고
차창에 바비인형이 흔들리는 목을 내밀고
다음 생은 비극으로 물들기를 꿈꾸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요람도
깜깜한 밤으로,
푸른 연기의 바깥을 미행하지
 
향 하나를 피우면 전생이 돌아오고
밤의 검은 창문 너머
활을 켜며,
아이들이 하나씩 별을 건너갈 때
시간을 가두었던 울음이 마저 풀리지
바람은 색(色)을 바꾸고 입술을 찾아오지
 
언니의 희고 긴 다리가 그립지만
오늘 밤은 아쟁을 타고 심해로 심해로, 입술은 휘파람 불며 말라가
 

# 돌발적으로 미지의 세계와 맞닥트리는 경우가 있다. 의지 밖의 어떤 영역이 홀연 눈앞에 나타나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한다. 그곳은 최초로 태어난 신천지로 기존의 질서나 이데올로기가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하고 매우 낯선 곳이다. 

 엘리아데는 『신화 · 꿈 · 신비』에서 모든 위대한 시인은 세계를 다시 만든다고 했는데 시에서의 세계 창조는 ‘초유의 사건’이 되며 ‘최초의 시간’ 탄생이다. 기존의 어떠한 논리로도 접근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태인 것이다.

 김재근 시인의 「아쟁을 타고 가는 나타샤」를 주목하여 읽으면서 우리 시의 새로운 풍경을 예감할 수 있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요람’조차 타오르는 상황은 비극의 극단이며 전모이다. 시의 주체는 작품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아우른다. 그의 시의 지평이 광활함을 감지하게 하는 대목이다. “죽은 새의 언어”가 자리하는 세계는 과거 곧 전생의 삶의 풍경이다. “수면 위를 걷는 그림자” 는 현재화된 자아로서 명료하게 전생을 응시하는 자이며 “검은 밤”으로 기록되는 생의 아픈 페이지를 읽고 있는 존재이다.

 현생의 삶 역시 “언니들은 울어야만”하는 고통의 풍경이다. 과거에서 이어지는 생의 내용은 여전히 어둡고 신산하다. 앞으로 이어질 미래 곧 후생 역시 “깜깜한 밤”으로 나타난다. 비극의 세습이며 한 존재의 잔혹한 역사이다. “향”을 피우며 다시 전생과 조우하는 시적 주체는 그리움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언니의 희고 긴 다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일 뿐 현실화되지는 않는다. 가닿을 수 없는 꿈의 실체임을 확인하고 다시 가슴에 담는다.

 마지막 행로는 “아쟁을 타고 심해로 심해로” 향하는 것이다. 그 심해는 존재의 심연이며 비극을 돌파하고자하는 내적 의지의 발현이다. 비극의 바닥까지 내려가 다시 치고 올라올 이무기의 미래이지만 화자는 “휘파람 불며 말라가”는 “입술”만을 슬쩍 보여줄 뿐이다. 이미 생의 전모를 통찰하고 있는 화자는 쉽게 전망하거나 제시하지 않고 ‘감춤’을 통해 드러내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낯설고 돌올한 이미지 구사를 통해 새로운 시의 지점을 보여주고 있는 김재근 시인.「아쟁을 타고 가는 나타샤」는 그가 단순히 감각적 언어 기교주의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ㅡ출처 : 문화저널2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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