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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와 예술의 만남 ④ 사진 / 박미산 ㅡ 관찰의 시선 또는 시적 상상의 아우라

문근영 2013. 10. 7. 12:52

 

시와 예술의 만남 ④ 사진 / 박미산
관찰의 시선 또는 시적 상상의 아우라
[61호] 2013년 05월 01일 (수) 박미산 misan0490@hanmail.net

눈은 우리가 외부세계와 만나는 다섯 가지 감각(시각, 미각, 후각, 촉각, 청각) 중의 하나이다. 본다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인 만큼 가장 쉽고 가장 즉각적이다. 그러나 ‘봄(seeing)’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와 시각경험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존 버거(John Berger) 는 인간의 시각경험에 대하여 1972년 발간한 Ways of Seeing이란 책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방식으로 보고 해석한다.”고 강조한다. 보는 주체는 소속사회의 문화적 체계의 영향 아래서 실재를 인식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는 보이는 대상의 성격과 의미는 보는 자가 어떻게 보았는가에 달렸다는 말이 된다.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있는 것이다. 같은 대상을 보고도 연령과 성별, 계층, 종교에 따라 달리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감각작용으로서 봄(seeing)이 아니다. 봄(seeing)이란 현실에 대한 감각적 수용뿐만 아니라 정신작용이 개입한 복합작용인 셈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과 인위적 구성물들은 특정한 해석체계를 통해서 이해되고 만들어지는 문화적 현상들이다. 문화에 대한 정의는 많은 인류학자가 문화현상을 관찰하고 해석하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름대로 정의를 해왔다. 수많은 정의 중에 문화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 Tylor, The Hidden Dimension, NY: Archor Books, 1969)의 정의이다. 그는 “문화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습득된 지식·신념·예술·도덕·관습·법, 그 밖의 능력과 습관 등을 포함한 복합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타일러의 정의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문화라는 개념이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이 복합된 총체라는 사실이다. 곧 문화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고유한 체계라는 것이다. 한국문화, 일본문화, 미국문화, 인도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인도인들이 집단 내에서 공유하는 고유한 체계가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공유된 체계로서의 문화란 국가와 인종 간의 경계로만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 계급, 특정한 이념 등에 따라 나누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 국가 안의 지역별, 구성원들의 성적·계층적 구분에 따라 다양한 층위의 문화가 문화 층위에 따라 다양한 하위문화(sub culture)들을 형성한다. 그리고 문화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인간은 눈으로 보는 모든 대상을 문화적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보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보는 것의 문제는 비교문화적(cross culture) 전망을 요구한다. 비교문화적 전망이란 상이한 문화 간의 특징을 가치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류가 보여주고 있는 문화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전망이다. 통 문화적 접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상 문화에 직접 뛰어들어서 질문서나 통계에 근거한 양적 방법론과 문화에 대한 깊은 관찰과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포함하는 질적 방법론을 모두 포괄한다. 단순히 구경꾼으로서의 관찰이 아니라, 다른 집단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 문화구성원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참여 관찰을 함으로써 사진가는 자신의 측면에 대한 시각화를 가져올 수 있다.

 

사진과 시를 기호와 텍스트로 인식한다면 두 대상인 갖는 근원적인 속성의 이질성에도 둘 사이는 소통이 가능하다. 사진과 시가 만나면서 각각의 독자성은 물론 새롭게 돋아나는 이미지는 독자에게 신선한 미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와 사진의 소통을 염두에 둔 작품들로 이승하 시인의 《폭력과 광기의 나날》(세계사, 1993)과 김기택 시인의 시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2〉와 〈송충이〉(《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 지성사, 1994), 황동규 시인의 〈인간의 맨다리〉(《우연에 기댈 때가 있었다》 문학과 지성사, 2003) 등을 볼 수 있다. 이들 시인의 시들은 사진이 시 창작의 모태가 된 것도 있고, TV를 보면서, 혹은 몸소 여행을 다니면서 본 시각이미지를 시로 창작하고 있다.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시인들은 사진과 시의 결합으로 새로운 상징적인 결과물로 전환해 놓았다. 이 글에서는 영상예술인 사진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언어예술인 시를 창작한 이승하와 언어예술인 시를 통해 사진이라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생성한 김기택 시인과 황동규 시인의 시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폭력과 광기의 수사학

우리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현실은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문학의 관심 대상이다.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삶의 이야기가 문학의 중심 주제이다.

이승하의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은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은 책이다. 이 시집은 암살, 마약과 에이즈, 전쟁과 고문, 인종차별과 기아 등을 사진과 그림을 도입하여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인류가 겪은 죽음과 폭력을 사진과 그림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고 시적 진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는 사진이라는 텍스트를 언어예술로 환원시킴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가 제시하는 사진과 그림은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말이 없는 사진을, 행동만을 보여주는 사진을 언어로써 해석한다. 사진에서 보는 잔혹하고 처절한 찰나의 순간을 시라는 텍스트를 통해 언어로 보여준다.

 

한 컷의 사진을 보자. 도로 위에 총상을 입은 사내가 누워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사내는 도로 한복판에 누워 있다. 무심하게 걸어가는 다른 사내의 뒷모습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일 뿐,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없다. 누워 있는 사내만 없다면 이 사진은 한적한 소읍의 풍경이다. 이승하는 한낮의 시골 풍경인 이 한 컷의 사진을 “공포의 한낮”이라는 제목의 시로 언어화한다. 

 

 

아이티의 하늘이 너무 푸르다
지평의 끝 구름이 피어오르는데
점심시간일까 거리는 별 기척이 없다
익숙해진 것일까 총성에 아랑곳하지 않는
능청맞은 이웃을 배경으로 원주민 하나
심장이 뚫려, 한길에 드러누워
지구의 자전을 멈춰 놓았다
전세계인의 시계바늘을 고정시켜 놓았다
『Newsweek』 1988년 1월 4일자 34페이지


—이승하 〈공포의 한낮〉 부분

 

 

사진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사진 한 장만으로는 정황을 알 수가 없다. 제시된 사진은 시의 문맥을 통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으로 재탄생된다. 시의 마지막 행 “『Newsweek』 1988년 1월 4일자 34페이지”라는 문구가 제시된 연후에, 이 사진에서 말하는 아이티의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구체화된다. 아이티에서 벌어진 민주화 투쟁으로 죽은 사내의 사진 한 장은 “전 세계인의 시계바늘을 고정시켜 놓”을 정도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이티의 하늘은 너무 푸르고 지평선의 끝에는 구름이 피어오르는데, 심장이 뚫린 원주민 하나가 죽어 있다. 아이티인들에겐 내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죽음이 일상화되었다. 그들은 주검을 보고도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한낮에 탕! 총성이 울리고 “심장이 뚫려, 한길에 드러누워/ 지구의 자전을 멈춰 놓”은 사내의 사진에 사로잡힌 화자는 시간과 지리상의 거리를 뛰어넘어 그 장면을 시로 그려낸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평화롭게 죽어있기에” 그대로 있으면 “질식할 것만 같”아서 화자는 언어로 이를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제 이웃과 조국과 역사가가 그의 이름을 지우리라
내 일을 남에게 떠맡기면서 내가 나를 지우게 되듯
거리의 핏자국 금세 지워질 테고 무풍의 거리
한가운데 나둥그러진 자네 몸 금세 부풀어오르리라


—이승하 〈공포의 한낮〉 부분

 

 

앞의 연에서 “전세계인의 시계바늘을 고정시켜 놓”은 사건은 Newsweek 1988년 1월 4일 자 34페이지 공간에 사진으로 남아 있다. 앞의 연은 사진을 묘사하고 있고, 이 연은 화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화자는 공간 속에 가둔 한 존재의 죽음을 시로 풀어내어 새로운 의미망을 만들어 낸다. 사진은 아이티 사내의 죽음을 구체적·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나, 시는 그 구체성을 지우고 폭력과 광기로 보편적·일반적 의미로 바꾸어 놓는다. 그럼으로써 사진은 시각적인 구체성을 확보해주고 시는 주제를 명료하게 언어화한다.

보도사진은 하나의 메시지이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이 메시지는 송신원, 전달 경로, 그리고 수신처로 구성되어 있다. 송신원은 신문의 편집으로, 일부는 사진을 찍고, 일부는 사진을 선별하여 구성하며, 또 다른 일부는 설명과 논평한다. 수신처는 신문을 읽는 독자이며, 전달경로는 신문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사진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사진은 무엇을 송신하는가? 정의상으로는 장면, 그 자체,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 아이의 앞에서
성호 긋지 말기를
이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기도 드리지 말기를
다만 묵상하기를
인류의 죄악에 대해 면역결핍인
인류에 대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머지않아 죽을 목숨의 눈동자는
다 맑지 다 두고
―중략―
나는 누구를 위해 참회해야 하나
무엇을 바라 글을 써야 하나
태어났다는 이유로 목숨은 죽어가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할 아이
커다란 네 눈동자가 오래
오래 나를 쳐다보고 있구나 


—이승하 〈이 아이의 눈동자 앞에서〉 부분

 

 

이 사진에서 송신원은 에이즈에 걸린 아이를 사진을 찍고 설명을 붙여서 신문이라는 전달경로를 통하여 수신처인 전 세계의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 사진은 에이즈에 걸린 아이의 지금 현재 상태를 한 컷의 사진으로 보여준다. 아이는 자신이 병에 걸렸는지, 곧 죽을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 시는 직설적이고 객관적인 어조로 에이즈에 걸린 아이를 그린다. “나는 누구를 위해 참회해야 하나/ 무엇을 바라 글을 써야 하나”라는 화자의 직설적 어조는 매우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읽는 이의 관심을 사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승하는 각각의 사진을 사진이라는 화면 구성을 통해 하나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사진 자체가 하나의 시적 구성물인 셈이다. 거기에는 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카메라의 시선과의 공모관계 속에 이끌려 들어가 있다. 그 시선은 시대적 관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시의 구성은 곧바로 시대적인 구성이 된다. 이승하는 보도사진 특유의 코드와 그 사진들이 실천되는 방식으로 사진을 끌어내 와서 시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가 사진의 특성을 ‘지금, 여기’에서 과거 한때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을 때, 사진과 시간의 문제가 개입된다. 시간은 그냥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물 흐르듯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항상 재구성된다. 즉 시간은 현재를 현재화하고, 과거를 과거화함으로써 재구성된다. 즉 사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시간의 구성은 ‘한때 있었던’ 현존, 혹은 사건성을 환기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데 사진은 그 필요성을 충족시켜준다.

이승하는 보도사진을 비판적 읽기의 대상으로 하여 사진의 프레임에 들어가 있는 발화뿐만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담론을 언어로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또 다른 호소력을 제공하고 있다.


 
  매크로렌즈로 보는 묘사의 힘

이승하는 사진이라는 시각텍스트를 갖고 언어이미지를 재구성했지만, 김기택과 황동규의 시는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한 컷의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하다.

김기택의 시는 사진을 찍듯이 대상의 세부를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대상이 가진 성질과 인상을 감각적으로 언술한다. 김기택은 관찰 대상을 매크로렌즈로 사물을 접사하듯이 정확하게 포착한다. 김기택의 관찰력은 대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사진을 찍듯이 그려낸다. 이러한 시작 방법은 시적 대상들을 순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과 친숙하게 되고 그 대상 주위에 남는 미묘한 분위기, 즉 아우라를 남긴다. 관찰 대상의 형태 이외에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정신현상이 아우라이다.

 

‘아우라(aura)’는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논한 개념으로 사진에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벤야민은 사진을 분석하면서 사진 그 자체에서 발하는 비현실적인 출현을 기술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의 이성 밖에 존재하는 음영에 대한 최초의 존재론적 발견으로 간주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비에 가까운 감정으로 의미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비논리적이면서도 지극히 심정적인 개념이다. 김기택의 시는 겉으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적확한 묘사를 넘어서 그 대상의 본질을 관통하는 언어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택이 제시하는 한 장의 사진을 응시하면서 그의 시적 상상력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이는 모래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살이란 살은 굶주림이 모두 발라먹은
지금은 생선가시처럼 눈만 뜨고 있는
한줌의 아이
빵을 기다리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들어올리던 가냘픈 모가지를
졸음이 톡, 꺾어버린다
무너지는
무너져 모래 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는
한줌의 갈비뼈

오랫동안 끈질기게 앉아서
독수리는 아이를 노려보고 있다
아아, 이렇게 슬픈 먹이도 있었던가
슬픈 먹이로는
날개가 강해지고 눈에 매서운 빛을 더할 독수리는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처럼 경건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졸고 있는
배고픔의 기억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졸고 있는
한줌의 먹이를


—김기택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2〉

 

 

김기택의 두 번째 시집인 《바늘구멍 속의 폭풍》(문학과 지성사, 1994)에서는 생존경쟁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동물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시는 아프리카 아이에 대한 두 편의 시 중에 한 편이다. 김기택은 시에서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를 묘사한다. 모래 위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는 ‘굶주림이 모두 발라먹은 생선가시’처럼 말라서 퀭한 눈만 갖고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는 먹을 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커다란 머리통을 지탱할 힘조차 없다. 시인은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아 힘이 없는 아이와 그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며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독수리를 한 화면에 배치한다.

 

김기택은 이 두 대상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감정 개입 없는 관조적인 시선과 어법이 죽음을 목전에 둔 아이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의 대비를 보다 선명하고 끔찍하게 그리고 있다. 시인은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의 앙상한 육체를 “가는 뼈의 깃대를 나부끼는/ 검은 살갗”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의 모양을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광호는 이 비유를 ‘두 사물들의 시각적 유사성’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육체가 단지 ‘텅 빈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인식 너머에는 또 다른 아우라가 내포되어 있다. 김기택은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치밀한 관찰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넘어서서 그 안에 내재한 숨은 힘, 아우라를 포착한다.

기아에 허덕이는 한 줌의 아이와 그것을 노리는 강한 날개를 가진 독수리와의 대비를 통해서 시인이 본 것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으면 다른 강한 것의 먹이가 된다.

 

 

아삭 아삭 빛이 부서지는 소리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송진이
송충이 혈관을 지나간다
부서진 빛이 송충이 내장 속에서
퍼진다 꿈틀거리며 간다

솔잎인 줄 알고 송충이 털 속으로
수액이 송충이 털 속으로 들어간다
선인장 가시처럼 뿌리내린 송충이 털
내장인 줄 모르고 섬유질 속으로
꽃인 줄 알고 털끝으로 희고 가는 선 끝으로


—김기택 〈송충이〉

 

 

김기택은 작은 대상인 ‘송충이’를 포착하여 클로즈업시킨다. 마치 해부학자같이 송충이 내장 속과 그것을 훤히 볼 수 있는 빛과의 조화, 대상과 시간이 얽혀 짜지는 하나의 시각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의 관찰은 섬세하고 예리하여 긴장감을 유발한다. 어느 고요한 한낮에 소나무에 기어가고 있는 송충이를 보는 순간 작가뿐만 아니라 송충이와 솔잎, 송진 등이 하나가 된다. 이러한 관찰은 괴테가 “자신을 대상과 긴밀하게 일치시킴으로써 그 자체가 스스로 이론이 되는 그러한 섬세한 경험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유리창에 송충이 한 마리 붙어있다
아파트 10층 창문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송충이가 기어온 기나긴 높이를 생각해본다
오를수록 더 높아지는 높이
아무리 힘차게 꾸물거리며 기어도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온몸이 허리로 된 송충이는 그래도
부지런히 뒤허리로 앞허리로 밀어올린다
허리밑 다닥다닥 점 같은 다리들이
유리창에 아슬 아슬 붙어있다
흰 갈대잎 같은 털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 *
이 나무는 가도 가도 거대한 평면 사각뿐이다
이파리 하나도 없이 어떻게 광합성 하나
아무래도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늘였다가
깊은 주름이 생기도록 줄이면서
송충이는 11층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김기택 〈유리창의 송충이〉 부분

 

 

첫 번째 시집인 《태아의 잠》(문학과 지성사, 1991)에서 시인은 ‘송충이’를 매크로렌즈로 사실적이고 즉물적인 접사를 함으로써 송충이와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와 일치시킨다. 반면, 네 번째 시집 《소》의 〈유리창의 송충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의 숨겨진 세부적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서 불분명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줄 뿐만이 아니라, 송충이의 미세한 부분을 밖으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육안으로 보는 것과 카메라의 근접촬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송충이의 기어가는 모습을 대강 짐작하지만, 정작 움직임을 위하여 내뻗는 송충이 다리의 자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의 육안은 몇 초 사이의 일을 모르고 지나친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 비로소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시집 《소》(문학과 지성사, 2005)의 〈송충이〉는 망원렌즈에서부터 표준렌즈, 매크로렌즈를 사용하여 대상과 화자 사이의 다양한 거리감을 보여준다. 카메라 앵글을 다양하게 하여 다각적인 방향에서 송충이를 바라봄으로써 송충이의 느릿느릿한 행동의 움직임과 시간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송충이는 “허리 밑 다닥다닥 점 같은 다리”로 10층의 거대한 평면 사각형 유리에 붙어 있다. 송충이는 “흰 갈대잎 같은 털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바람에 기우뚱거리는 몸을 유리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습관의 힘이 아니었다면 떨어졌을” 터이지만 송충이는 “허공을 더듬다”가 “길이 없는 것 같지만” “주름이 생기도록” 11층을 기어오른다.

 

시인은 단지 보이는 것만 포착하지는 않는다. 그 대상 너머에 있는 숨어있는 의미를 그리고자 한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이미지가 담지 하는 메시지를 코드가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구분하듯이 이 작품에서도 코드 없는 것과 코드 있는 것이 보인다. 김기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고층빌딩 유리창에 힘들게 올라오는 송충이를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송충이로 표상되는 현대인의 힘든 삶을 견뎌내는 운명에 대한 통찰을 그리고 있다.

 


언어예술을 영상미학으로

 

잊을 수 없으리
시에라 레온
오늘처럼 텔레비 화면 밖으로
인간들 통째로 뭉그러져 나오고
안에선
머리와 사지(四肢)와 몸통이 따로 뒹구는 속에
군화 신은 다리들이 졸지에 발맞추어 걷는 걸 본 날이면,
잊을 수 없으리
인도 바라나시 거리 모퉁이
알맞은 굵기의 나뭇가지처럼 말린 인간의 맨다리들
옹이 박힌 다리들
언젠가 둥치마저 말라
온몸이 늦가을 나무처럼 깨끗해지면
갠지스 강가에 나가
가볍게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불길에 몸 맡기지.
때로 정강이 하나 탁 튀어 공중에 난다
어린 날 자치기 자처럼 황홀히 몸을 비틀며.
미친 듯 하늘 속을 날던
어린 날의 맨다리여!


—황동규 〈인간의 맨다리〉

 

 

화자는 TV에서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보고 있다. TV에서는 아프리카 내전의 참상이 그대로 방영된다. 사지가 멀쩡했던 사람들이 폭격을 맞아 팔다리와 몸통이 따로 뒹굴고 있고, 화면이 바뀌면서 앙상하게 마른 어린 군사들이 군화를 신고 행진한다.

화자는 헐거운 군화 속의 어린아이의 마른 다리를 보면서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보았던 옹이 박힌 사람들의 다리를 떠올린다. 곧이어 화자의 상상력은 화자 자신의 어린 날까지 불러온다. 화자는 직간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끌어온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화자는 심층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어린 날 여름내 벗고 다니던 맨다리는 까맣게 그을었을 것이고, 궁핍한 그 시대의 어린아이들은 인도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말랐을 것이다. 화자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다리와 인도의 옹이 박힌 다리들과 화자의 어린 날의 맨다리를 불러낸다. 화자는 타자들로부터의 시선에서 결국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린다.

 

인도인들은 바라나시에서 죽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바라나시에 있는 갠지스 강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과 성자들이 모여들고 시체들은 흰 천에 싸여서 운반되어 온다. 운반된 시체는 갠지스 강에서 화장하고 나서 뼛가루를 강물에 뿌린다. 화장하다가 시체 일부가 탁 터지며 공중에 날기라도 하면 근처에 있던 개들이 달려들어 먹기도 하고, 장작 살 돈이 부족하면 덜 태워진 시체 일부가 강물에 버려진다. 버려진 시체는 강물에 있던 커다란 물고기가 물에서 튀어 올라 그것을 먹기도 한다.

한편,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내전이 10여 년간 계속되어왔다. 정부군과 반군 모두 18세 미만의 어린 병사들이 대다수이며, 심지어 13세 정도의 어린이들도 많다.

화자는 아프리카의 어린 병사들의 가느다란 다리와 예전에 바라나시에서 보았던, 너무 말라서 마디만 보이는 인도인들의 마른 다리를 연상한다. 불길에 튀어 오른 정강이를 보며 자치기를 연상하고 자치기는 시공간을 넘어서서 화자의 어린 날을 불러온다.

화자는 유년이란 과거를 회상으로만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하여 아프리카와 인도라는 나라로 세계를 확장한다. 화자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계까지 허물고 있다. 

어릴 적 미친 듯 뛰어놀던 유년의 화자는 TV가 아닌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통째로 뭉그러진 주검을 본다. 화자는 여행 중에 보았던 갠지스 강가의 주검을 “가볍게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불길에 몸 맡기”는 황홀함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수잔 손탁은 “이미지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계속해서 상황을 설정하고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창작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시도 아프리카의 어린 병사와 인도인들의 마른 다리와 화자의 어린 날의 맨다리가 총체적으로 관련을 맺음으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표출한다. 황동규 시인은 여러 정황을 이미지를 결부시키고 이를 시화(詩化)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한다.

 

 

사진과 시, 상호텍스트성의 미래

 

크리스테바는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모든 텍스트는 인용구들의 모자이크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시인들은 사진이라는 텍스트와 시 텍스트의 결합으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았다. 영상예술인 사진이 언어예술인 시의 모태가 된 것도 있고, 언어예술이 영상예술로 전환되는 것을 보면 둘 사이가 소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과 시가 만나면서 각각의 독자성은 물론 새롭게 돋아나는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승하는 사진을 텍스트로 하여 언어를 기호화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김기택과 황동규는 시라는 텍스트를 통해 마치 생생한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시인은 사진을 텍스트로 하든, 언어를 텍스트로 하든 간에 대상을 냉정하게 관찰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내고 있다. 이는 관찰 대상과의 교감과 소통을 통해 삶의 성찰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견고하면서도 세밀한 묘사를 추구하여 대상의 본질을 관통하는 아우라와 팽팽한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이들 시는 사진과 시가 결합하여 미학적인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사진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선은 카메라의 시선과 함께 끌려 들어가 있다. 시인들의 시선은 시대적 관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시의 구성은 곧바로 시대적인 구성이 된다. 시인들은 보도사진 특유의 코드와 그 사진들이 실천되는 방식으로 사진을 끌어와서 시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과 시의 결합은 시의 외연을 넓혀줌으로써 뛰어난 결과물을 탄생시킨다. 사진의 함의는 사회 문화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사회를 역사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움직이지 않는 사진이라는 대상을 언어체로 바꾸며 기계적인 예술의 비문화성을 사회제도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더한층 매력적이다.

사진은 내용과 주제를 한 장의 프레임에 담아내는 압축미와 은유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점에서 시와 많이 유사하다. 디지털 매체를 수단으로 하는 환경변화가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하게 들어온 이상 시와 사진의 만남이 가속화될 것이다.

 

시와 사진의 만남은 이승하, 김기택, 황동규 시인뿐만이 아니라 김정환, 신현림 등 많은 시인들이 시도했다. 앞으로도 촌철살인의 언어로 정지된 사진에 혼을 불어넣어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내는 시들이 많이 창작되기를 희망한다. 

 

박미산 
misan0490@hanmail.net / 시인. 인천 출생. 2006년 《유심》,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루낭의 지도》가 있다. 2001년에 ‘생명의 빛, 인디아’ 개인 사진전을 개최했다. 현재 고려대, 방송대 출강.

 

 

ㅡ『유심』(2013. 5)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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