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막말에 폭발하는 그리움의 활화산 | ||||||||||||||||||||||||||
| 신광철의 시읽는 CEO(002) 정양의 토막말 | ||||||||||||||||||||||||||
| ||||||||||||||||||||||||||
|
불세출의 창업영웅이자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별칭으로 회자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티브 잡스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시를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공자는 "시에서 일어난다(興於詩)"고 했습니다. 이것이 경영자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고품격 창업신문, '창업닷컴'은 신광철 시인에게 청하여 독자여러분을 시에서 일어서는 경지로 안내하기 위해 '신광철의 시읽는 CEO'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세상을 살면서 사랑만 한 행복이 있을까요. 한 세상을 살면서 질펀한 사랑 한 번 못해 보고 죽는다면 헛살았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도 가슴이 아리고요,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화나게 합니다. 그럴 때 욕을 한 번 하세요. 세상의 모든 구조물은 노동의 결과지요.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기까지 과정을 보면 삶은 결코 간단치 않았지요. 겨울을 이겨내 꽃을 피우고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과 사나운 바람, 가뭄도 있었지요. 견디어서는, 견디어 내서는 빨간 사과를 매단 것이었지요.
그 정성들인 사과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면 허망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정성들인 정순이가 떠난 겁니다. 내 사랑을 식지 않았는데 <정순이> 사랑은 식었나 봅니다. 진정 미치고 환장하지요. 이런 판국에 시의 아름다움을 논할 처지였겠습니까, 거칠어야지요. 상징이 오기 전에 뱉어 버린 말이 저녁노을에 섞일 때 또 한 번 아름다워지는 것이었지요.
어느 것 하나 사람의 땀과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그럼에도 땀과 눈물은 살아있음의 확인입니다. 침묵으로 소멸되어 가는 바다가 파도로 뒤척이며 생성과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땀과 눈물도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 가게 하는 원동력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근원은 사랑이지요. 사랑의 뿌리는 성이고요, 성은 혼자의 성이 아니라 나누는 성이 최고지요. 아니라고요? 그러면 할 수 없지요, 나 혼자 우기는 수밖에. 헌데 이 성(性), 즉 섹스에서는 감꽃 향기가 나거든요. 왜냐고요. 미치게 좋아서이지요.
시의 법칙을 부수어서 성공한 시
바닷가에 대책 없이 써진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이란 말에서 끌어온 이 시도 미친놈처럼 거칠게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거든요. 시의 법칙을 많이 지켜서가 아니라 시의 규칙을 부순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랑시가 감성적이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지요. 아마 시인은 깡패인 듯합니다. 아니라고요. 그러면 아닌가 보지요, 뭐.
가을은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마지막 선택임을 생각해야 하는 때지요. 푸른 잎으로는 겨울을 건널 수 없음을 확인하고는 스스로 가벼워지고 작아져서는 봄으로 가는 게지요.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생명을 담은 씨들이 진정 작고 가벼워지는 것은 봄을 만나기 위한 깨달음이었던 게지요. 가을은 봄을 향하고 있음을 이 가을에 확인하게 됩니다. 스스로 작아지는 일은 진정 용기였습니다. 겨울을 건너야 봄을 만날 수 있음을 어릴 적에도 알았지만 그 큰 의미는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것을 알고 나서였지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을 우리는 잊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지속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면 빠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 발 뒤처져 걸어가면 사유의 시간을 만나게 되거든요. 사람이 생각하며 산다는 것 이상의 가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단언하고 싶은 가을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 중 제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노동하는 모습과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더군요. 노동을 거두고 노을을 어깨에 짊어지고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지요. 그리고 대지를 쓸어안으며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을 보면 또한 감동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을에 태우고 있는 사람은 진정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풍경은 이 지상에서 진정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떠난 여자, 정순이를 이렇게 거칠게 그리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그 여자, 정순이와 사랑을 하고 싶은데 제철인 여름바닷가에 사람은 많지만 정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겠지요. 나도 이 시 따라서 욕 한 번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씨펄, 하고 소리쳐 보는 게지요. 사실 우리는 씨펄이라고 하지 않지요. 그것보다 더 강하고 거친 '씨팔'이라고 합니다. 차마 시에서 그냥 쓸 수가 없어서 순화시킨 게지요. 사람 사는 일이 그렇잖아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요. 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을 때마다 이마에 숫자가 적히는 거지요. 상상해 보셨나요. 저 사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번 했구나,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말을 어디에선가 했더니, 아주 좋은 발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군요.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었나 봅니다. 상상력이 유치하다고요. 맞습니다. 유치하지요. 저는 그 유치한 재미로 살거든요.
인생이 심심하잖아요. 가끔은 흰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흐흐흐 웃는 것도 괜찮은 일이거든요. 왜냐고요, 그냥 심심해서지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유를 캐거나, 원인과 분석을 해서 세상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거든요. 삶은 몸으로 사는 것이지요. 마음으로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못 들었습니다. 앞 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사란 것이 노동의 결과물이거든요. 좆도 써야 쾌락도 느끼고, 기쁨도 맛보는 게지요. 사랑도 확인하고요. 가족도 만들어야지요. 원초적인 것에서 결국은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은 좆같다고 합니다. 좆이란 말에서는 직립이 먼저 떠오릅니다. 우뚝 선 솟아오름, 직립의 절정 위에 인간사는 이루어져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 지상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은 직립의 쾌락에 기반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좆을 세우는 일이나 허리를 세우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씨펄>이라는 말의 어원은 <씹할>에서 온 것이고, <씨팔놈>의 어원은 <씹할놈>입니다. <섹스를 할>만한 놈이라는 뜻이 남성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니 어쩌면 적극 권장해야 할 말일지도 모릅니다. 씹이란 말은 여성의 그곳을 이야기하고, 좆이란 말은 남자의 그것을 지칭하거든요. 그것이 뭐냐고 굳이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기지요. 성기의 이름을 대라고는 하지 마세요. 저도 교양 있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거든요. 근현대사에서 중요시할 덕목인, 가정이란 구성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으로 구성된 원초적 단위입니다. 부부는 아직도 성을 진행 중에 있고, 자식은 성의 산물이지요. 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성과는 무관한 듯 보이려 하고 있지요. 우리의 가면은 얇아서 간혹 들키기도 하거든요. 사람이 행복해하는 적이 드물게 있는데 그 중 으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고 하는군요. 헌데 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보세요. 진정 씨펄, 이란 말이 안 나오겠나.
시가 시어로써 적당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보면 기분이 갑자기 후련해집니다. 그 씨펄이란 말이 주는 속 시원한 느낌과 이후 찾아오는 후련한 감동 때문이지요. 감동이란 말에 역정을 내실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 그 짓을 하며 놀 때만큼 행복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사랑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기도 하거든요. 늑대 같은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여우같은 여자의 본능이지요. 그 본능에는 솔직함이 배어있거든요. 은유와 상징, 비유 그리고 형상미라는 것도 기실 감동이란 말보다는 후순위거든요. 남의 눈을 무시하고 적을 수 있는 용기도 남자답고 늑대 같다는 것이지요.
원초적인 것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
좀 더 진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막가자는 거지요. 이왕 나온 김에 정양 시인의 글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정양 시인의 홈피에 실린 글을 훔쳐왔습니다. 다른 것 훔쳐가는 건 도둑이라고 하는데 글 훔쳐가는 건 도둑으로 치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지요. 마음씨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글을 돈으로 쳐주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 조금 하고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요즘 문예지의 경우 시나 글을 달라는 곳은 제법 되어도 원고료를 주는 곳은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원고료를 준다 해도 실로 시간이나 노동력에 비하면 참 눈물 나지요. 정신노동은 노동이 아닌 거지요. 특히 문학적인 노동은 돈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게지요.
정양 시인의 산문을 조금 소개하려 합니다. 산문은 시보다는 아무래도 보다 직접적이고 자세한 기술이 가능해서 글쓴이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걸쭉한 글 하나 올립니다. 제목은 <새벽편지19>인데 소제목으로 '곯은 씹에 젓국 치듯'이라고 붙어있습니다. 수신인은 '김영춘 선생님께'라고 적혀 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새벽 편지를 씁니다. 엊그제 월례토론회 때 만날 뻔했다가 못 만났군요. 앞니를 다섯 대나 뽑고, 그 후유증으로 밖에 나가질 못했습니다. 요즘은 또 곯은 씹에 젓국 치듯, 독감을 앓고 있습니다.
곯은 씹에 젓국 친다는 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이가 많던데, 우리 김영춘 시인도 혹시 처음 듣는 말은 아닌지요? 엎친 데 엎친다든지 설상가상이라든지 하는 말을 보다 절망적으로 보다 처연하게 체험적으로 해보는 좀 유식(?)한 말에 속합니다. 짐작하거니와 그 말은 아마도 화류계에서 자주 쓰이던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유식하다는 표현은 그 말을 모르는 이들이 많은 점을 감안해서 짐짓 해보는 말이죠. 어쨌든 지난번 노골적으로 무식하게 첫눈이 내린 뒤에, 그 노굴무식한 맛을 더 즐기기라도 해야겠다는 듯인 눈이 또 무지무지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한 판에, 그야말로 곯은 씹에 젓국 치는 격이죠.
재작년 겨울쯤이었던가요. 이병초 시인이
"동네 사람덜, 눈이 좆나게 와부렸네요,"
했더라는 어느 눈 내리는 마을 이장님의 새마을방송을 소개한 일이 있었는데 오탁번 시인은 또 그 새마을방송을 시로 만들어서, 폭설로 인한 참상이 이렇게 농담이 되고 시가 되기도 했던가 본데, 퍼붓는 폭설의 이 노골무식한 행패를 한겨울의 당연한 정취쯤 여기며 눈이 더 내리기를 기다리는 나 같은 이들도 있기는 있나 보던데, 지칠 줄 모르는 눈보라를 창 너머로 건너다보면서, 지칠 줄 모르고 절망적으로 눈을 기다리는 이들을,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던 노래 속의 빨찌산을, 눈보라치는 고속도로에서 길 막혀 오도 가도 못한다는 이들을, 지척이 천리인 듯 오도 가도 못하고 서로 보고만 싶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기왕에 나온 김에 정양 시인의 글을 본 따서 지은 시도 감상하고 가시지요. 시 한 편 더 읽어 세상에서 이룰 일 하나 못했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감상해보시지요. 정양 시인이 시상을 제공하고, 오탁번 시인이 시로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시입니다.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오탁번 시인의 '폭설'>
정양 시인의 이야기가 오탁번 시인에 의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폭설내린 전라도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시가 된 게지요. 타지방에선 욕처럼 들리기도 하고, 거칠게 느껴질 사투리지만 해학이 시에 퐁당, 빠지니 읽을 만합니다.
거북한 속을 쓸어내릴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분은 속이 후련해진다고 하실 분들이 더 많을 듯합니다. 평소에 해보지 못한 말을 대신 해주니 그렇습니다. 정양 시인은 '정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남성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정양, 정씨 성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를 부르는 호칭처럼 들리는데 생김새는 울퉁불퉁 남성스럽고, 글 또한 막힘없이 화통합니다. 하지만 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깊고도 다감한 면을 느끼게 합니다. 참 이상하게도 오늘은 저도 덩달아 욕을 하게 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좆>이나 <씹>을 가지고 시를 만다는 사람은 행복하겠습니다. 속 시원하게 욕을 하고도 멋진 시가 되니 말입니다. 예쁜 말만 골라다 붙인다고 시가 되지 않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시지요.
정양 시인은 시를 일부러 꾸민 듯한 느낌이 없이 아주 쉬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절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을 읽은 사람은 말을 쉽게 하지요. 그리고 간략하게 합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통하는 소통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겠지요.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꾸미지도 않고 감동을 주는 남성다운 시를 만들어 정양 시인의 글을 읽으면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정양 시인의 시 한 편을 더 보시지요. <무게>라는 시입니다.
감상하면서 개 주인이 하는 짓을 떠올려 보세요. 웃음이 나오게 해학과 기지가 보입니다. 하지만 묵직한 생명에 대한 외경에 깔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는 주인에게 안겨 개장수가 두려워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개, 목숨을 가진 존재를 기만하고, 팔아버리는 한 인간의 씁쓸한 뒷모습을 떠올리면 참 숙연하고 막막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쇠창살로 얽힌 개차가 왔다
앉은저울이 나오고
앉은저울 위에 김씨는
오들오들 주인 품에 안기어
<정양 '무게'>
정양 시인의 시는 생명의 외경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한 생명의 무게가 어떤 다른 생명의 무게보다 가볍지 않은 것이어야 하는데, 세상은 여린 영혼에게 아프게 상처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라는 이름 위에 나는 무엇을 얹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문득 치밀어 오릅니다.
정양 시인의 일상을 적은 산문이 오탁번 시인에 의하여 <폭설>이라는 시로 태어나고, 정양 시인은 시어가 되기에는 거칠고 상스러운 말들이지만 정양 시인의 마음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만 그 거친 단어가 순정에 부풀게 만들고, 개장에서 떨고 있는 현장을 끌어와 생명존중의 철학이 슬며시 담겨 있게 하는 특출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참으로 크고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인가 봅니다. 멋진 시를 만나는 날은 바람난 소녀처럼 괜히 즐거워지고는 하는데 정양 시인을 만난 제 기분이 그렇습니다.
● 신정순 작가는?
| ||||||||||||||||||||||||||
ㅡ 출처: http://www.chang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54(창업닷컴)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이병률의 「마음의 내과」평설 / 김나영 (0) | 2013.10.07 |
|---|---|
| [스크랩]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결핍을 넘어선 충만 - 고은의 신작시 다섯 편 / 김응교 시인 (0) | 2013.10.07 |
| [스크랩] 신광철의 시읽는 CEO(001) 오탁번의 굴비 - 능청스러움 혹은 에로티시즘의 해학 (0) | 2013.10.07 |
| [스크랩] 언어의 흔적 ③ 도회점경 (0) | 2013.10.07 |
| [스크랩] 나태주 시인의 죽은 시인들의 나라 11/박인환/세월이 가면 (0) | 2013.10.07 |
onul5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