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매리앤 무어] 詩

문근영 2013. 9. 18. 12:39

詩 / 매리앤 무어(Marianne Moore)

 

 

 

나 또한 그게 싫다.

그 싱거운 짓보담 훨씬 중요한 일들도 많다.

그러나 완전히 멸시하며 그걸 읽노라면

결국 그 속에 <진짜>가 있을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꽉 잡는 손, 커지는 눈, 그럴 만할 때 치솟는 머리카락,

이런 것들은

엄숙한 해석이 주어질 수 있대서가 아니라

쓸모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것들이 아주 먼 데서 끌어다 붙인 소리라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 똑같이 모르는 것은

칭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예컨데 거꾸로 매달린

또는 먹이 찾아다니는 박쥐.

떠다니는 코끼리

둥글게 뛰어보는 야생마

나무 밑에 지치지 않는 늑대

벼룩에 물린 말처럼 피부를 경련하는

요지부동의 비평가

야구팬

통계학자-

또한 사업문서와 교과서를 차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 모든 현상이 중요하다. 그러나

구분할 필요는 있다.

반쪽짜리 시인이 억지로 높이 끌어올렸을 때

그 결과는 시가 아니다.

또는 우리 사이의 시인들이

상상의 축자주의자逐字主義者가 되기 전에는

교만과 사소함을 초월하여

진짜 두꺼비가 웅크린 상상의 정원을 제시하기 전에는

우리는 詩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 한편

당신이 그냥 생경한 채로의 시의 재료를 요청하고

또 한편 진짜를 요청한다면

그때 당신은 시에 흥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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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아는만큼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사람은 보는만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앎과 봄'이 인식의 지평과 깊이 결정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적인 앎이 詩 창작에 미적, 구조적 완성을 보장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봄(looking)과 앎 즉, 인식(cognizance)만으로 시를 짓는다면 시는 '관찰기'나 '소묘' 또 '과학'에 더욱 가까운 예술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집필의 전제조건이라면 박물관장이나 도서관장, 혹은 만물교양백과 집필자가 모두  대문호가 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앎'을 초월한 시계視界는 바로 '상상'의 눈을 달고 있습니다. 그 눈을 카메라의 렌즈와비교한다면 하나가 아닌 무수한 다안多眼렌즈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렌즈는 머리가 아닌 심장에,고막에,달팽이관에, 솜털 위에, 비강 속의 점막 위에, 혀 끝에,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물과 현상을 입체적으로 보고 받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시점은 전혀 색다른 곳에서 사물을 조명하고 하나의 직관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상상하는만큼 본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상상은 머리 아닌 가슴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부족한 자식의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고 바라며 믿고 그려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에게 그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그것은 한 점의 오물도 없이 맑고 순수하여 삿되지 않은 사랑일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모든 어둠과 미천함을 알며 장차 그 아이의 모든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상'의 영역을 초월하는 모든 경계를 허무는 힘은 인간의 가슴에서 우러난 '사랑'일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람은 사랑하는만큼 본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은 이 모든 눈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느끼고 보는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쓸모가 있으며 그 앎과 봄의 모든 거품을 걷어내고 언어의 엄정한 저울 위에 '상상의 축자주의자'의 시는 발견되는 것입니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김다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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