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1999)
...........................................................................................................
1962년 생
나와 동갑이다
커피와 친구와 시를 좋아했던 그
27세의 나이로 파고다 극장에서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를 부르며 그는 갔어도
주옥같은 그의 글들과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는 남아
우리들의 가슴을 적시기도 하고
쓸쓸한 가슴에 모닥불의 불씨로 여전히 남아있다.
기.형.도
어느덧 황혼이라 그가 말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자신의 짧은 생을 예감했던 것이다
예감하면서 푸시시 꺼져버릴 노을이어도
서럽지 않으며
이제는 모두를 용서할 때라며
자신의 남은 두어 폭의 햇빛을 예감한 것이리라
그 햇빛이 노을이라는 명찰로 바꿔 달고
새벽녘 이슬로 낙하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를 부른다.
기도를 타고 올라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형식을 찾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져버린 그의 가엾은 말들...
흩어져버린 말들처럼 그는 그렇게 흩어져 갔지만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
별이 지고 새벽이 뜨는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0) | 2013.09.16 |
|---|---|
| [스크랩] [권자미] 괜찮아 (0) | 2013.09.16 |
| [스크랩] [전동균]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0) | 2013.09.15 |
| [스크랩] [박 철] 딸을 기다리며 (0) | 2013.09.15 |
| [스크랩] [정겸] 유서 (0) | 2013.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