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의 이념을 가진 적 있다
김왕노
1
그 사막에서 옥수수 싹이 돋아났다고 했다. 옥수수 뿌리는 죽은 자의 몸을 텃밭으로 자랐다고 했다. 슬픈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고 옥수수는 죽은 자의 주머니에서 죽음의 즙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죽은 자의 넋을 옥수수 줄기로 잎으로 밀어 올렸던 것이다.
2
꽃 시절은 출가 중이니 옥수수나 키우자니까. 옥수수 꽃도 가만히 쳐다보면 볼만 한 것 옥수수수염은 옹고집의 세월을, 꺾이지 않는 지조를 가르쳐 주는 것, 올 곧게만 자르는 옥수수의 이념을 가지자니까. 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고구려의 무사처럼 잎을 휘두르는 옥수수의 검법을, 그 나란히 잎맥의 정신을 본받자니까. 굶주린 세월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그 번식력을 그 생명력을 닮아서 우리도 척박한 세월 위에 척척 서보자니까.
3
너무 가지런하게 빛나는 노란 사랑을 읽은 적 있다. 너무 가지런해 먹지 못하고 숙희가 내게 가져와 내밀던 옥수수, 그 노란 사랑, 그 노란 식욕, 알알이 까서 서로의 손에 놓아주던 그 노란 알의 사랑, 노란 사랑의 노란 이념, 그 가지런한 정갈한 사랑, 어디서 이제는 홀로 익어갈 노란 사랑, 서걱거리는 바람 속에서 홀로 노랗게 익어가다가 퇴색할 사랑
4
옥수수를 딸 때 옥수수 대에서 옥수수가 분리되며 내던 딱 소리가 우주를 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우주의 목탁소리라는 걸 알았다. 빈 식용유 통 하나 들고 몰래 숨어들었던 전방의 옥수수 밭, 들키면 말뚝 박고 영창 간다지만 졸병에게 삶아주려 숨어들었던 옥수수 밭, 별 초롱초롱해 더 무서웠던 밤, 오지리 고운 분이가 잠든 밤, 조심스레 옥수수를 돌리자 나던 딱 소리, 옥수수가 옥수수 대를 떠나며 내던 작별의 소리, 우주 끝까지 번져가 여운마저 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죽였다. 지금도 내 가슴의 가장자리를 물들이고 있는 그 푸른 소리
5
딱 옥수수 한 그루만 이 지구 위에 자라나게 해다오. 딱 한 사람만 지구에 있고 딱 한 송이 꽃만 피고, 딱 한 마리 새만 저녁을 지키고 그러면 어느 별에서 딱 한 사람이 찾아들고 서로의 짝을 먼별로부터 불러들여 주면 옥수수는 비로소 푸르고 푸르러져 옥수수만으로 연명하고 옥수수로만 노래하는 세월이 오게 해다오. 옥수수의 정부 옥수수의 당국만 있게 해다오. 옥수수의 달콤한 그늘만 세상에 가득 차게 해다오.
-출처 : 계간『예술가』(201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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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오면 나보다 이웃이 나의 바탕과 배경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저울질 한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좋은데 그 환경에서 사람답게 길러졌느냐,
사회와 이웃을 바라보는 가치와 배려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
상대를 존중하며 나의 존재를 드러낼 진정성을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옥수수의 이념과 정신과 생명력을 배우자고 하는 화자의 의식이야말로
올곧은 생각을 가진 게 분명하다
어떤 상황이든, 처지를 펼치든 접든, 한때나마 옥수수의 이념으로 무정하고 지내자는
지극히 겸손한 제의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옥수수에게도 한창이라는 시절이 있다
이런 시절이면 인간에게도 사랑을 나눌 만한 시기이다
노란 사랑이란다
-가지런하게 빛나는
-그래서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사랑
-가지런하고 정갈한 사랑
-때가 되면 홀로 익어갈 사랑
그렇다, 세상은 변한다
변하더라도 그것은 모습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것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은가?
화자가 바라는 세상은 옥수수의 이념을 펼치는 세상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 탈 없는 세상이 되리라는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옥수수만을 먹고
-옥수수로만 노래하는 세월
-옥수수의 정부
-옥수수의 당국
-옥수수의 달콤한 그늘만
가득한 그런 세상, 불가능하지만 바른 세상을 바라는 염원이 있어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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