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채천수] 무면허의 봄

문근영 2013. 8. 22. 11:47

 

 

 

무면허의 봄

 

채천수

 

 

성적에 내몰리다 성격 다 비틀린 채

일탈의 오토바이로 펄럭이는 머리카락

황량한 아스팔트에 굉음으로 맞선다.

 

잠깐은 통쾌해도 어둠이 찢은 청춘

밥과 잠자리가 잠시 붙들어둘 뿐

마음이 떠나버린 집

몸만 남아 버틴다.

 

일시적 반항심이 빈집털이로 나서고

태반이 석 달 안에 원조교제를 나간다는

구겨진 통계 속에는 무면허의 봄이 있다.

 

 

 

-출처 : 시집『통점(痛點)』(학이사, 2012)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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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諷刺)의 자박(自縛)-내처 앓는 이명(異鳴)들

-채천수의 시조 「무면허의 봄」을 읽고

 

수능이 끝나고 나면 자칫 방황하는 모습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수능 세대가 아니라도 그 또래에는 능히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전제는 늘 있는 법이다.

탈선과 일탈의 청춘들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을 바라보는 눈은 먼저 풍속의 관점으로 더 완연하다.

그만큼 그릇된 청춘의 행각이 가져오는 결과가 암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세태시의 관점 외에

화자는 그들을 그르쳐 가는 청춘들의 위태로운 존재 행태를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용언(用言)을 통해 대상 주체의 활동적인 형태를 취해 도드라진다.

‘내몰리다’와 ‘비틀린 채’가 그렇고 ‘펄럭이는’ 것과 ‘맞선다’는 관계 설정이 그렇다.

주로 서술부(敍述部)에 위치하는 이들 움직임씨와 어떻씨의 작용은

대상주체의 행동양식의 적극성을 부여함으로써

세태의 깊이와 양상을 극단적인 부정의 양태로 도드라지게 한다.

존재의 양상을 치유하는 방식으로서의 풍자는, 처음엔 저열한 풍속의 양태를 개괄하지만,

점차 개인의 존재론적 측면으로 초점을 옮아간다.

결국 풍속의 세태가 가진 어찌할 수 없음이라는 자기방기적인 현실을

풍자는 마냥 오지랖 넓게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채천수의 시편에서 보여 지는 풍자의 기미(機微)는 언뜻 보기엔 단순한 세태비판적인 측면이 완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존재론적 각성을 촉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오늘의 저열한 풍속의 일단이 풍자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놓는 수순을 밟고 있다 하겠다.

‘무면허의 봄’을 살고 있는 청춘의 행각은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저열한 세태이지만,

개별적인 관점에서는 3수(首)에서 보여주는 극단적 일탈은 풍자의 인상으로 도드라진다.

일탈한 모든 청춘이 ‘빈집털이’가 되거나 ‘원조교제’의 패악에 빠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자는 세태비판을 겨냥하지만

특정 개인의 구체적인 범법적 피의사실을 고지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풍속의 전체와 개인이 하나의 반성적 아이템을 구성하고 공유하는 지점에서

풍자는 서서히 그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세태가 왜 가능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풍자는 풍속과 세태를 통해 탐사한다.

그것은 저열한 삶에의 회의를 보여줌으로써 그 반대적 상황을 강렬하게 꿈꾸게 한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유종인 님이 쓰고 詩하늘에서 엮음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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