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조지훈] 병에게 - [신표균] 당뇨애인

문근영 2013. 8. 13. 11:59

병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잖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날 몇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애기해보세그려.

 


(『조지훈 전집 1』. 나남. 1996)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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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애인


신표균

 

 

전혀 뜻밖에 내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예상치도 바라지도 않은 그가
짝사랑을 해왔는지
집시되어 떠돌다
손잡아 주는 이 하나 없자
나를 찜한 모양입니다
징그러워 온 몸 움츠리는데
그는 신이 나서
혈관타고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며
내 육체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조심조심 뜨는 밥숟가락에도 제 먼저 올라앉고
물 한 모금 과일 한 쪽 먹는데도
떨어질 줄 모릅니다
싫다고 싫다고 밀쳐내도
진드기처럼 붙어 다닙니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라치면
마누라 사이에 끼어들어 커튼을 칩니다
아! 이젠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어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며 쓰다듬고 보듬어
동반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뇨애인

 

 

 

-시집『어레미로 본 세상』(심상, 2009)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지만 우리네 정서는 병에 대해서만큼은 가족들이 당사자에게 숨기고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불치의 병이라고 하면 환자가 충격을 받아 자포자기할 수도 있고 치료를 게을리 하여 더 빨리 보내게 될까 두렵기도 하고 또 그게 자식된 도리라고 믿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티브를 보니 본인 자신도 암을 앓았었고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한인의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별한 사고는 의사가 암에 대한 선고를 내리면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의사는 쌓아온 경험과 학계에 보고된 통계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에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환자의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의사인들 알 수는 없겠지요.

  
   병에 대한 별다른 개념이 없던 젊은 시절엔 병 하면 감기만이 병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고 실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몸도 기계라 오래되면 삐거덕거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간해서는 낯선 이방인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친해지지도 않으며 또 친해지고 싶지도 않는 게 병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늙어서 오는 병을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병에 대한 두 편의 시를 봅니다.  조지훈 시인의 '병에게' 가 모든 병을 아우르는 포괄적이라면 신표균 시인의 특정병을 지칭한 당뇨애인은 개괄적입니다. 어느 병이든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에 병이 찾아왔을 때 초기에 잘 다스려야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예고도 없이 날아오는 돌처럼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하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왜 하필 나냐고, 나한테 왜 이러느냐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 병 또한 왜 내 탓을 하냐고 성을 내겠지요. 두 편의 시에서 배웁니다. 마누라 사이에까지 끼어 드는 몹시 성가스러운 존재지만 병이 찾아왔을 때 떨쳐내려고 애쓰지 말라고 합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다정한 친구처럼 잘 대해주라고 합니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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