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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채영] 외줄타기 명인의 고백

문근영 2013. 8. 11. 16:32

시집 속의 화제작

 

이채영 시집 『엽총을 어디에 두었더라?』(현대시시인선112)에서

 

 

외줄타기 명인의 고백

 

매질이 무서워서도 떨어져 다칠까 두려워서도 아니었어 왜 허공의 길뿐이어야 하는지 어디

로든 도망치려고 무작정 집을 나왔지

 

두고 온 줄은 땅 멀미에 마른번개로 내리치고 태풍 지나간 날 밤, 매미 울음 더욱 힘찬 땅의 맬 데 없는 줄에서 무수히 떨어져 내렸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공사장에서 고기잡이배에서 있지도 않은 줄을 타다가 몸져누운 어느 여인숙

 

내 몫이 외줄타기뿐이어서 허공을 밟으며 살아내야 한다면 뒷짐을 풀고 물러설 때와 비켜설 때를 맞춰 한 발 두 발 노 젓듯 팽팽한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리

 

올라서야만 비로소 걸어볼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높더냐 얼마나 길더냐 도도해지는 흥으로 솟구쳐 올라 관중의 탄성을 채찍 삼아 하늘을 나는 한 마리 고통이여

 

 

◯◯◯◯ 허공의 길밖에 없는 길.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다시 허공으로 오르는 길. 떨어지고 다시 떨어져 내려서 변주되는 윤회의 삶, 한그루 나무가 자신의 바다를 건너는 길. 그 길에 생을 건 명인의 고백처럼, 나의 삶은 얼마나 오르는 길인지, 얼마나 또 떨어져 내리는 길인지, 멀고 먼 길의 고통 하나를 엄숙하게 바라본다. (정석봉)

 

 

2012년 『시산맥』가을호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정석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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