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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차창룡] 벼랑 위의 사랑

문근영 2013. 8. 8. 14:14

 

 

 

벼랑 위의 사랑

 

차창룡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주거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야윈 상록수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너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어라,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졌고,

세상을 우리를 받쳐 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았구나.

 

버릇처럼 벼랑 위로 돌아왔지만, 벼랑이란 보이지 않게 무너지는 법,

평생 벼랑에서 살 수는 없어, 당신은 내 마음을 떠나고 있었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지는 법인지.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내 마음은 항상 낭떠러지였다. 어차피 죽을 용기도 없는 것들아,

벼랑은 암시랑토 않다는 표정으로 다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출처 : 시집『벼랑 위의 사랑』(민음사, 2010)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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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과 재생의 길이 빛의 세계를 향하다

-차창룡의 시「벼랑 위의 사랑」을 읽고

 

차창룡의 시는 현대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희극적이고 정치한 성찰, 자아와 욕망의 근원을 향한 서정적 모험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인도와 불교의 소재를 그 흔한 견성(見性)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세계와 마주한 삶의 자리로 이끌어 온다.

 

 우파니샤드는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聖典)이며 고대 인도의 철학서로서 성전 베다의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인데, 우파니샤드는 자유를 궁극적 실재인 신과 합일한 상태로 보는데 궁극적 자유를 얻지 못한 이들은 시공간의 사슬에 얽매여 끊임없이 필멸자의 운명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베다 시대였지만 아직 그 실체는 분명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재생의 개념은 두 가지 길을 찾아낸다. 궁극자의 빛의 세계인 데바야나(Devayana)와 윤회를 거듭하는 어둠의 세계인 피트리야나(Pitryana)가 그것이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은 언제나 현생의 윤리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시인은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또 다른 순환의 주기를 맞아 재생의 길을 찾으려 한다. 태양의 불 속으로, 우주적인 바다로 나아가는 것만으로 ‘사랑’의 궁극적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인식하는 시인에게 ‘사랑’은 단순하게 대상과의 합일과 교감으로 한정되지 않고, 우주적 순환의 광대한 순리 속에서 자기 존재를 새로이 거듭나게 하는 일체의 것이 된다. 그렇게 시인이 꿈꾸는 순환과 재생의 길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빛의 세계’를 향할 것이라 믿는다.

 

 길이 끝나는 곳, 그래서 결코 길이 될 수 없는 곳, 그러나 길 끝에 허공(虛空)이 비로소 시작하는 곳. 벼랑은 그렇게 시인 앞에 의미론적 층위로 다가선다. 그의 ‘사랑’은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 되는 것이라고 한다. 둥근 바위가 곧 부화할 것 같은 알의 형상으로 허공을 향해 솟아오른 벼랑에서 “당신과 나”는 일체가 되어 떨어지고 동시에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피의 제단에서 스스로 죽음을 향해 뛰어내리는 자는 희생자이며 동시에 정화된 자로서 어떤 성역(聖域)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다른 삶을 받아들인 자기 참해(慘害)적인 상징은 아직 현실에 묶여 있다. 벼랑에서 떨어진 자는 계곡의 “태양이 끓는 용광로”에서조차 자기 파괴를 거부당한다. 여전히 불은 “한 번도 가까워진 적 없는” 태양의 문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미망으로부터의 탈주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죽음의 끝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섣불리 발설하지 않는다. 삶은 결코 죽음을 통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벼랑’은 꾀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 김태형 님이 쓰고 詩하늘이 엮음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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