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과의 연애
강영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회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화분이 나뒹구는 꽃집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일이면 잊힐 메모지처럼 지루한 시간의 미열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어서
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내가 낯설어진다
어떤 저녁에는 내가 없다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
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
―『詩로 여는 세상』(2013. 여름)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솜나리/박숙경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이하석] 것들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1) (0) | 2013.07.21 |
|---|---|
| [스크랩] [신용목] 두 시의 시 (0) | 2013.07.21 |
| [스크랩] [조태일] 풀씨 / 물 · 바람 · 빛 ―국토 11 (0) | 2013.07.21 |
| [스크랩] [박영미] 산골 - 그 너머 1 (0) | 2013.07.21 |
| [스크랩] [이이체] 이산(離散) (0) | 2013.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