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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敬)’으로부터 유학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다 [이광호]

문근영 2013. 6. 4. 00:26
제 270 호
‘경(敬)’으로부터 유학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다
이 광 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유학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학문이다. 과학적 진리관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대상적 진리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과학이 대상화하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시의 세계로부터 거시의 세계까지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직접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 과학의 덕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과학적 진리가 유일의 진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주인인 주체로서의 나이다. 주체로서의 나는 과학적 인식의 반대편에 머물고 있어 과학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과학이 어떻게 할 수 없다. 대상화되지 않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과학은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은 부정되고 마음과 관련된 일체의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과학에서 주관적이라는 말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마음이 부정되고 마음과 관련된 단어는 빛을 잃기 시작하며 덕성과 가치는 학문과 교육의 현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고도의 과학문명…현대인을 얼빠진 인간으로 만들어

  과학은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무한한 지식과 그것을 이용한 과학문명을 안겨 준 비싼 대가로 인간과 자연에게서 주인을 빼앗아 가버렸다. 주인을 상실한 인간, 옛말로 얼빠진 인간이 현대인의 모습은 아닌가? 배우면 배울수록 사람들은 대상적 진리에 몰두하게 되고 대상적 진리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주체로서의 나, 마음으로서의 나, 생명 그 자체로서의 나는 그 존재감을 잃어간다.

  유학은 도를 진리로 여기며, 도를 알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다. 도를 알고 실천한 인물들을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으로 존숭하였다. 수 천 년 동안 존숭된 성현들은 모두 물질세계를 넘어선 마음의 진리를 설파하였으며 이들이 남긴 말과 삶의 흔적은 유교 경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유학자들은 경전을 기초로 삼아 이들의 삶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도를 진실하게 알고 바르게 실천하는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에 삶을 바쳤다. 과학의 진리와 대비시키면 이들이 도달한 진리는 성인의 진리이며 이들의 학문은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 즉 성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퇴계의 경과 마르틴 부버의 만남」…지금도 멀고 먼 여행

  나는 퇴계 이황의 대표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통하여 유학과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내가 처음으로 부딪친 용어는 ‘경(敬)’자였다. 퇴계는 책 전체의 내용을 경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재잠도(敬齋箴圖)」와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를 제9도와 제10도로 배치하여 경이 성학의 핵심이라는 것을 돋보이게 강조하고 있다.

  도대체 경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성학십도』에는 “마음은 몸의 주재이며 경은 한 마음의 주재(心者一身之主宰而敬又一心之主宰也)”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상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이 회피하는 마음을 몸의 주재라고 선언하고 있다. 나아가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실현을 성학이라는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세계를 대상적으로 이해하도록 길들여진 나에게 이 책은 삶과 학문을 마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나는 논문의 주제를 경으로 삼아 경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다. 몇 년 전 작성한 보고서의 주제가 떠올랐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읽고 난 뒤에 작성한 ‘나와 너의 만남’을 주제로 한 독후감이었다.

  이 책은 만남의 의미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부버는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을 ‘나-그것’의 관점과 ‘나-너’의 관점으로 나누어, ‘나-그것’이 과학적 세계이해의 관점이라면 ‘나-너’는 인격적 상호이해에 기초한 종교적 세계이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퇴계의 경과 마르틴 부버의 만남」은 나의 학부 졸업논문의 제목이 되었다. 논문이 아닌 또 한편의 독후감이 되고 말았지만 이 글은 잊고 살았던 나를 되찾으며 성학을 통하여 성인의 진리를 이해하고 찾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를 밝히는 과정은 아직도 멀고 먼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넓고 깊은 마음의 세계와 만난다는 것은 우주과학 서적을 읽으며 무한의 시공에서 펼쳐지는 별들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에 못지않은 행복감을 나에게 안겨준다. 내가 얻고 느끼는 행복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과학적 진리와 성인의 진리는 과연 어떻게 만나고 화해하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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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광호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역서 :『성학십도』, 홍익출판사, 2001
        『주역천견록』, 태동고전연구소, 2002
        『근사록집해1,2』, 아카넷, 2004
        『옛 문인들의 초서간찰』공역, 도서출판 다운샘, 2003
        『궁궐의 현판과 주련1,2,3』공저, 수류산방, 2007
        『이자수어』, 예문서원, 2010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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