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유배지기행](5)공양왕-삼척 ‘궁촌리’

문근영 2013. 5. 10. 07:11
[유배지기행](5)공양왕-삼척 ‘궁촌리’
강릉에서 국도를 타고 삼척을 지나 17㎞쯤 가면 고개가 하나 나온다. 그 고개를 넘자마자 왼쪽에 바닷가 마을이 있다. 도로에서 왼쪽 마을버스 정류장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공양왕릉 입구’라는 아주 작은 표석이 있다. 그 안내판 화살표를 따라 오른편을 바라보니 큰길에서도 능이 보였다.

그러나 능이라곤 하지만 공양왕릉은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주차장 오른편에 삼척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이름 없는 무덤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정도였다. 전에는 더 초라했을 터인데, 그래도 삼척시에서 돌계단을 만들고 봉분을 정비하여 보통 무덤보다는 크기 때문에 한눈에 보아도 예사 무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공양왕릉에는 네 개의 봉분이 있었다. 이 능은 그 전까지 궁촌리 사람들이 벌초 정도나 해주던 것을 1977년 당시 삼척 군수와 근덕 면장이 주선하여 새롭게 단장했고, 매년 3월 근덕면 봉찬회에서 날짜를 잡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공양왕릉은 봉분 밑단을 돌로 쌓아 돌리는 등 제법 크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다시 세 개의 봉분이 있는데, 바로 옆의 봉분은 공양왕의 정비인 순비(順妃) 노씨(盧氏), 또 하나는 세자 석(奭), 그리고 나머지 가장 봉분이 초라한 것은 시녀나 말(馬)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려 마지막 왕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공양왕은 유독 눈물이 많은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을 축출하고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차례로 폐위시킨 뒤 꼭두각시로 앉힌 왕이 바로 공양왕이었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웠으나, 곧 두 부자가 공민왕(恭愍王)이 아닌 당시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승려 신돈(辛旽)의 핏줄이라 하여 폐위시킨 것이다. 이때 고려 20대 신종(神宗)의 7세손인 왕요(王瑤)를 찾아내 34대 왕위를 계승케 했다.

‘고려사’ 기록에 보면 공양왕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날 밤 너무 근심이 되어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왕위에 오르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평생 입을 것 먹을 것과 시중할 사람이 모두 풍족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되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공양왕은 매우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으며 그래서 그 많은 왕씨 핏줄 중 이성계 세력에게 꼭두각시 왕으로 선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인 신흥 사대부들은 공양왕 재위 기간 중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른바 ‘과전법(科田法)’이다. 이는 기존 권력자들, 즉 기득권 세력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흥 세력들이 경제 기반을 닦는 요체가 되었다. ‘과전법’을 시행할 때 토지 문서를 모두 몰수하여 불태웠다. 당시 산더미 같은 문서들이 사흘 밤낮 동안 타올라 개성 하늘이 연기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때 공양왕은 그 연기를 보며 고려왕조의 몰락을 예감하고 남몰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나이 45세에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재위 2년8개월 만에 이성계에게 양위했다.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고 이때부터 조선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왕(王)씨들은 이성계 일파의 후환이 두려워 전(全), 옥(玉), 용(龍), 전(田)씨 등으로 성을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공양왕은 왕비와 세자, 시녀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간성으로 옮겨지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 삼척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긴 지 한 달 만에 죽었다.

이러한 공양왕의 최후를 생각하며 양지바른 능 곁에 쪼그려 앉아 있으려니, 바로 등 뒤의 바닷가 쪽에서 소금기가 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어떤 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언덕 위에 조릿대가 무성한 숲을 이루어 수런거리는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양왕릉 언덕 위에서 본 바다가 저 멀리 수평선으로부터 밀려들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밀려든 파도가 모래밭에 하얀 물거품을 토해내며 밭은기침처럼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유배시절 공양왕도 저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바다를 느껴보기 위해 궁촌리로 향했다. 공양왕릉에서 언덕을 넘으면 바로 마을이지만, 길이 없어 차를 타고 돌아서 바닷가로 갔다.

‘궁촌(宮村)’이란 마을은 공양왕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했다. 왕이 잠시나마 머물던 촌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궁촌리해수욕장’으로도 잘 알려진 바닷가 모래밭에는 다른 동해안 해수욕장과는 달리 수천의 갈매기들이 내려앉아 조용히 읍(揖)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동해안 갈매기란 갈매기들은 다 몰려와 작은 궁촌리 앞바다 모래사장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일까. 그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고려가 멸망할 때 죽은 충신들의 원혼이 저 갈매기들로 환생하여 공양왕릉을 향해 어깨 흔들며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공양왕릉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니, 그곳이 바로 궁촌리 뒷동산이었다.

궁촌리 해변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숨어 있는 절경이 나오는데, 산 아래 깎아지른 절벽 밑에서는 흰 이빨을 으르렁대며 바위를 물어뜯는 성난 파도가 눈길을 휘어잡는다. 조용한 궁촌리해수욕장과는 달리 이곳에선 파도가 잠시도 쉬지 않고 절벽에 자신의 몸을 마치 학대라도 하듯 내던지고 있었다. 아마 공양왕도 시름에 겨우면 이곳에 와서 저 깎아지른 바위 절벽과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려대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저 절벽과 파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으므로 공양왕이 느끼던 숨결을 나 또한 저 하얗게 일어서는 포말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분노였다. 밖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아니라 애써 안으로 삭이느라 가슴만 타들어가는 안타까운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저 바다의 포말은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지 못하고, 그 절벽의 발끝만 물어뜯으며 앙탈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발길을 돌려 공양왕이 살해되었다고 해서 ‘살해재’로 부른다는 고개를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궁촌리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로 공양왕릉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가 난 고개가 ‘살해재’라고 한다. 살해재 위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고개를 넘어오는 차들이 속도를 늦춘 채 힘겨운 운행을 하고 있다. 옛날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이 고개에서 공양왕 일가족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는 오솔길로 산이 험하여 거의 아무도 다니지 않던 고개였을 것이다.

나는 당시 살해당한 공양왕 일가족의 시신을 궁촌리 사람들이 몰래 옮겨다 마을 뒷산에 장사지내는 장면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며 고개를 뒤로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소설가·엄광용〉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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