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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성사 서산대사의 성역지이기도 한 대흥사는 그 규모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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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을 답사한 후 두륜산 상가에 있는 전주식당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배고프던 차에 점심을 맛있게 먹고 두륜산 대흥사 탐방에 나섰다. 매표소에서 사찰까지 10리에 걸친 그 울창한 숲이 역시 명불허전이다.
매표소 부근에 있는 산문인 연하문 두륜산 대둔사라는 글씨는 강암 송성용의 글씨이다.
문 뒤에서 보면 연하문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울창한 숲길을 걸어올라가다보면 유선여관이 나온다. 영화 장군의 아들, 서편제를 촬영했던 곳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아비가 눈먼 딸을 데리고 노래를 가르치면서 머물던 곳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유선관의 줄탁동시라는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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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교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부도밭이 나온다. 13대종사와 13대강사들의 부도가 늘어서 있는 부도밭이다. 두륜산의 자랑거리는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도량이라는 것이다. 서산대사 이전까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찰이었지만 서산대사가 자신의 금란가사와 발우를 대흥사에 전하면서 자신의 법맥을 잇게한 후로 수많은 그의 제자들이 찾아들어 일약 조선 최고의 사찰로 떠오르게 된다. 그 증거가 부도밭이다. 부도밭이 장엄하기로는 단연 두륜산 대흥사인 것이다.
서산대사 부도, 초의선사 부도, 혜장선사 부도 혜장선사는 대흥사 12대 강사이자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백련사의 주지로 다산과 깊은 교류를 가졌던 분이시다.
서산대사 부도
서산대사 부도비
초의선사 부도
초의선사 부도비 왼쪽으로 보이는 부도가 혜장선사의 부도이다.
13대종사를 배출한 것을 나타내는 돌비
13대강사를 배출한 것을 기념하는 돌비
부도밭을 지나면 해탈문을 만나게 된다. 해탈문에 있는 두륜산 대흥사라는 현판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고
해탈문이라는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 지혜를 지니고 그 지혜를 실천하면 해탈에 이르게된다는 의미이다.
해탈문을 지나니 두륜산 가련봉과 두륜봉을 필두로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산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륜산은 8개 암봉이 이룬 연꽃형 산세를 이루고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703m)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 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었다. 이 여덟 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다. 오른 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손가락에 붙인 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을 듯 만들면 영락없는 두륜산의 지세가 된다.
왼쪽이 정상인 가련봉. 오른쪽이 두륜봉. 두륜봉에서 산 이름이 나왔다. 절 마당에 인연이라는 시가 있다.
인 연
우리 서로
인연하여 삽시다.
잠시 쉬었다 가는
人生의 한 방랑길에서
서로 사랑했던들
그게 무슨 罪가 되겠습니까우리 서로 그만한 거리를 두고 삽시다. 가까워지면 너무 멀어질까봐 두려워 하는 것 이것이 다 人生의 공상이라 하였거늘 우리 서로 잊으며 삽시다. 내가 너를 잊어가듯 너 또한 나를 아주 잊어도 좋고 이것이 집 없는 나그네의 고독이라니 이런 고독쯤 가슴에 품고 산들 어떠합니까 현월 지음무염지 크기는 작지만 연못의 가장자리를 이리 돌아가고 저리 들어가는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어 놓아 연못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섬은 하나뿐인데 보는 위치에 따라 몇 개가 더 있는 듯 보인다. 섬을 중앙에 두지 않아 변화와 생동감이 느껴진다. 돌아가며 보면 연못의 모양이 다 달라 보인다. “폭 20여m에 불과한 연못이 이렇게 커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오묘한 설계 때문이다. 무염지의 모양이 마음 심(心)자 모양이라고도 한다
무염지 참선문구인 처염상정(處染常淨)에서 나온 것으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뜻인데 더러운 곳에서 자라도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을 뜻하기도 한다.
초의선사상 대흥사 13대종사이기도 한 선사의 속성은 장씨고 이름은 의순(意恂), 자(字)는 중부(中孚)다. 초의(艸衣)는 법호(法號)다.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 남평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대덕(大德) 벽봉민성(碧峰敏性) 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선사는 차츰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은거의 뜻을 갖고 대둔사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띠집을 짓고 “뱁새는 항상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에만 있어도 편하다”는 한산시(寒山詩)에서 일지(一枝)를 딴 일지암(一枝庵)을 지어 일생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선사는 이곳에서 1866년 81세의 연세로 입적했다. 법랍 65세다.
표충사
표충사는 서산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대사와 뇌묵당 처영스님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표충사 현판의 글씨는 금물로 쓴 정조대왕의 친필이고 어서각의 현판 글씨는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의 글씨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 세분의 영정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44)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서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그는 수군절도사로 재임하였던 1845년에 초의선사가 중건한 대광명전의 불화 조성에 시주하였다. 대광명전(大光明殿), 표충비각(表忠碑閣)의 굵직한 획의 예서 편액도 신관호의 글씨이다.
대광명전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절 그의 제자인 소치 허련과 위당 신관호, 친구인 초의 등이 추사의 해배를 기원하며 조성한 전각이다. 위당이 글씨를 쓰고 초의가 단청을 그렸다. 지금은 승려들이 공부하는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표충사의 외삼문 사당이란 유교의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인데 따라서 유교와 불교가 혼합된 모습을 표충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흥사에는 조선후기의 명필들이 쓴 편액이 많이 남아 있어 마치 서화(書畵) 전시장과 같다. 정조대왕의 친필에서부터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등의 필적(筆跡)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충비각 이 글씨도 위당 신관호의 글씨이다.
대웅전권역
대웅전
경내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인 대웅보전 대웅보전 현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사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대둔사에 들렀다.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촌스러운 이광사의 글을 떼어 내고 자신이 직접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때 ‘무량수각’ 현판도 하나 더 써 주었다. 9년 후 유배에서 풀려 대둔사에 다시 들렀다. 이때 초의선사에게 이전에 떼라고 한 이광사의 현판을 도로 걸게 하고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게 했다고 한다.
역시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 천불전
천불전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동국선원에 걸린 '일로향실(一爐香室)',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는 편액도 추사의 글씨이다.
백설당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은 미불체를 잘 구사한 구한말의 명신으로 두 차례나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대흥사에 전하는 필적도 전라도관찰사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필적은 '명부전(冥府殿)', '응진당(應眞堂)', '백설당(白雪堂)'과, 해탈문의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편액이다.
응진당
가허루 원교 이광사의 제자였던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다. 안쪽에 보이는 천불전이라는 글씨는 스승 원교 이광사의 글씨여서 스승의 글씨 앞에 쓰는 것이라 단정하게 썼다. 가허루의 휘어진 나무가 일품이다.
대둔사는 구역을 네 곳으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대웅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과 요사체가 있는 남원, 그리고 나라에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표충사 영역, 마지막으로 표충사에서 북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침계루 침계루의 편액의 글씨가 독특하다. 동국진체의 완성자 원교 이광사의 행서체 글씨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분이다. 동국진체의 창시자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이광사가 완성했다고 한다. 천불전(千佛殿), 해탈문(解脫門)의 편액도 이광사의 글씨이다.
침계루로 들어서는 멋진 다리, 심진교(尋眞橋)이다. 건너기만 해도 진리를 찾는다는 다리? 침계루라 ..... 계곡(금당천)을 베게삼아 누워있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무척 낭만적인 이름이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에 잠도 ......
침계루 앞의 노거수
일지암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일지암 편액 강암 송성용의 글씨이다.
초의선사상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였으며 1866년(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 간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수조)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돌부엌),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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