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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44 양주 회암사지
조선시대에 제일 큰 절은 어느 절이었을까요? 불보사찰인 양산 통도사였을까요. 아니면 법보사찰인 합천 해인사일까요. 그도 아니면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였을까요? 전부 아닙니다. 정답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檜岩寺) 입니다.
옛 사진만 보고 찾아간 회암사 터는 너무 크고 웅장하여 벌어진 입을 닫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기에 양주시에 부탁을 하여 항공사진을 빌렸습니다. 1997년 시굴작업부터 2008년 완료될 9차 발굴 작업까지 총 12년이 걸린다니 경주 황룡사지와 비슷한 국내 최장기 발굴 작업입니다. 본 절의 면적만 만여 평이 넘는 방대한 유적입니다.
큰 장대석을 높직하게 쌓은 기단들이 9줄이나 늘어선 모습과 무수하게 박혀있는 주춧돌은 절터라기보다 왕궁 터를 보는 듯 합니다. 계단 소맷돌도 큼직큼직하여 보는 이를 압도 하는데 태극무늬가 조각되어 높은 품격을 보여 줍니다. 관솔불을 올려놓아 야간 조명등 역할을 하던 정료대(庭燎臺)도 8개나 보입니다. 큰 절에서도 한 쌍 이상은 본적이 없습니다. 절터 동북쪽 구석에 6m높이의 키가 훌쩍 크고 호리한 탑이 있습니다. 부도라고 하였으나 근래 들어 승탑으로 고쳐 부르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주 불전인 보광전 뒤에는 많은 건물이 서있던 자리에 초석들이 즐비합니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후 거처로 이용하였다니 별궁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토수와 잡상, 청기와에 직경 30cm의 청동풍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궁궐 수준의 화려한 건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웅장하였던 조선 최대의 중심 사찰이 어떻게 망하였을까요?
회암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선사와 그 제자 나옹(懶翁)선사, 손제자 무학(無學)대사로 이어지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한국불교 중심 법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공스님은 인도 마갈제국(Magadha) 만왕(滿王)의 셋째 아들로 아란타사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충숙왕 13년(1326) 고려에 입국합니다. 충숙왕의 환대를 받으며 2년 반 동안 전국의 사찰에서 법회를 엽니다. 원나라로 간 스님은 공민왕 12년(1363)에 입적을 하면서 자기의 유골을 고려로 보낼 것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공민왕은 지공스님의 제자 나옹스님에게 회암사에 지공스님의 부도를 세우게 합니다.
고려의 국사 자리에 오른 나옹스님은 스승의 지시대로 회암사를 동방 제일 사찰로 중창을 합니다. 낙성식에 앞서 1376년 문수회(文殊會)가 열리자 전국의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듭니다. 성리학을 내세우는 관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나옹스님을 지방으로 추방시킵니다. 병중이던 나옹스님은 여행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을 합니다. 스님의 다비식에 여러 가지 이적이 일어나는 바람에 회암사는 나옹스님을 추모하는 인파가 더욱 많아집니다. 불교 탄압을 하려던 관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된 것이지요.
고려가 망하고 억불승유정책을 택한 조선왕조가 시작 되지만 회암사는 무학스님을 왕사로 모신 태조 이성계의 후원으로 더욱 번창합니다. 이후 극심한 불교 탄압 시기에도 회암사는 왕실 전용사찰로 그 지위가 유지 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탄압을 견뎌온 회암사도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명종의 섭정을 맡은 문정왕후는 1551년 보우(普雨)스님을 선종판사(禪宗判事)로 임명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켜 불교 중흥을 꾀합니다. 이렇게 15년간 불교를 지원하던 문정왕후가 1565년 봄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친 후 세상을 떠납니다. 조선 최대의 사찰인 회임사를 불태워 불교를 말살하고자 기회를 노리던 유생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많은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제주목사 변협은 이유도 없이 보우를 죽입니다. 큰 스님을 잃은 회암사는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도 없이 화재로 망해버립니다.
당시 양반들이 절에 방화를 하고 그 터에 서원을 짓거나 묘터로 쓰는 일이 관의 묵인아래 자행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회암사 좌측으로 난 길을 800m쯤 올라가면 순조 28년(1828)에 지은 또 다른 회암사가 있습니다. 이 절 옆 언덕에 지공, 나옹, 무학스님의 부도가 있습니다.
제일 아래에 태종 7년(1407)에 세운 무학스님 부도가 있습니다. 2벌대의 높은 기단에 팔각 난간을 둘렀습니다. 고급 시설입니다. 두 마리 용이 감싸고 있는 몸돌은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용이 살아있는 듯 합니다. 지붕돌은 목조건물을 본 따서 만들었습니다. 처마는 겹처마 형식으로 아래에 연꽃잎을 새겼습니다. 지붕 내림마루에 용두를 배치하고 보주 모양의 상륜부를 올렸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부도로 보물 제 388호입니다.
사각 석등은 한 쌍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법주사와 영암사지의 쌍사자 석등은 사자가 일어서 있는 모습이나 회암사의 사자는 쪼그려 앉은 모양으로 앙증맞습니다. 머리 갈기와 꼬리털이 살아 있는 듯 보입니다. 보물 제389호입니다.
무학스님 부도에서 6m 쯤 위에 지공스님 부도와 석등 부도비가 있고 그 위로 나옹스님의 부도와 석등이 있습니다. 무학스님의 부도에 비하여 문양이 없는 단순한 형태입니다. 나옹스님의 부도비는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1997년 보호각에 불이 나서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예서로 쓴 소중한 비석으로 보물 제387호이데 새로 만든 복제 비석을 보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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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앞에 큰 레미콘 공장이 있어 분위기가 영 아닌데 양주시에서 땅을 사들였답니다. 유구들을 복원하고 출토된 유물의 전시관을 지어 놓으면 훌륭한 답사처가 될 것입니다. 회암사지 발굴에 기대가 큰 양주시의 걱정은 불교계에 소유권을 빼았기지 않을까 하는것입니다. 봉선사에서 복원을 하여야 겠다고 소송도 불사할 태도랍니다. 법정에서는 이길것 같은데 혹여 대선 때 표에 환장한 후보가 불교계에 소유권을 준다고 약속을 하고 당선이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발굴 중이어서 출입이 불가능하여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셔야 하지만 그래도 가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림.글.사진=김영택 펜화가honginart@hanmail.net
주간조선보다 훨씬 많은 사진을 올립니다. 다음 주에는 해남 대흥사의 無染池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뜻으로 만든 멋대가리 없는 연못에 비해 빼어난 연못으로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연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