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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문
태조 5년(1396)에 완성된 서소문(西小門)의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습니다. 문루(門樓)가 없는 대신 문 밖에 옹성을 둘렀습니다. 영조20년(1744) 문루를 세우면서 이름을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꿉니다.
소의문은 인천과 강화를 잇는 관문으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으로 내 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조선후기 성문 밖에 칠패시전이 생겨 상업의 중심이 됩니다.
1805년 천주교 박해 때 신도들을 서대문 밖 형장과 새남터에서 처형 하였습니다. 중앙일보사 옆 철길 건너편 서소문 공원이 옛 형장 자리입니다. 이 서소문 형장으로 넘어가는 작은 다리가 있어 ‘눈물다리’라 하였습니다. 한문으로는 누교(淚橋)라 쓰지 않고 누교(?橋)라 썼습니다. 같은 ‘눈물 누’자 이지만 ?자는 눈물이 흐르지 않고 눈에 고여 있는 모양으로 비감함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슬프면 눈물도 멈출까요?
대한제국 시절, 소의문 안에는 물지게를 지던 물꾼에서 대신으로 출세한 이용익이 살았고, 문 밖에는 상점의 하인으로 법부대신 자리까지 올랐던 이하영의 집이 있었습니다.
물꾼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르다고 소문 난 이용익은 빨라야 닷새가 걸린다는 전주~한양 간을 12시간만 돌파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놀라게 합니다. 전주부사가 출발 시간을 적은 서신을 들고 뛰어 고종에게 전한 것이니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황후와 고종간의 긴밀한 소식을 번개같이 전달하여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 공로로 단천부사를 거쳐 병사로 승진하여 황실의 재정을 도맡으면서 실세가 됩니다. 금광 채굴권을 승인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친러파인 이용익은 일본이 득세하면서 러시아로 망명합니다만 많은 재산을 육영사업에 쾌척하여 남은 재산이 없었답니다. 보성중,고,전문학교의 전신이 이용익이 세운 학교입니다.
부산 간산 상회 하인이었던 이하영은 한양으로 올라와 미국 선교사이며 의사였던 알렌박사에게 간청을 하여 심부름을 해주며 영어를 배웁니다.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까지 마친 이하영은 외부아문의 주사로 벼슬길에 들어섭니다. 미국 주재 공사관의 서리 공사로 재임시 1,000여명의 명사를 초대하여 워싱턴 역사상 가장 큰 댄스파티를 개최합니다.
갓 쓴 도포차림에 유창한 영어와 능숙한 춤 솜씨, ‘상투 멋쟁이’란 별명으로 인기가 대단하였답니다. 이탈리아 육군 대신의 딸이 이하영에 반하여 청혼을 하였으나 국법에 어긋난다고 거절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 황제로 하여금 고종황제에게 국제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을 넣게 하였답니다. 이후 일본 주재 공사, 외부대신, 법부대신에 이르는 파격적인 출세를 합니다. 친일파가 된 이하영은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까지 받았고, 대륙고무공업소를 설립하여 국내 최초로 고무신을 만듭니다.
구한말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소의문은 1914년경 철거되었는데 도로를 내면서 초석이 모두 제거되고 성벽도 남아있는 부분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대략 중앙일보 주차건물 옆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 중앙일보 7월 6일자 칼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