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김영택의 펜화기행 14 -영은문

문근영 2013. 3. 20. 06:23

제목: 김영택의 펜화기행 14 -영은문
분류: 칼럼
이름: 8.김영택






영은문이 헐린것이 1896년이고
1885년 10월 서울 - 의주간 西路電信이 개설되었으니
이 그림은 그 이전의 모습입니다.



영은문 앞에 독립문이 서있습니다.
본래의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70m쯤 옮긴것입니다.


 

영은문


  독립문 소공원의 독립문 앞에 키가 큰 돌기둥 두개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의 주춧돌이랍니다.
영은문이 얼마나 높았기에 주춧돌의 높이가 5m나 될까요.

  
  조선 태종 7년(1407) 서대문 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그 앞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웁니다.
세종 12년(1430) 모화루의 규모를 확장하고 이름을 모화관(慕華館)으로 바꿉니다.
중종 32년(1537)에는 홍살문이 초라하다고 헐어내고
높은주춧돌 위에 청기와를 올린 쌍주문(雙柱門)을 세웁니다.
절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해 보이나 높이가 11.5m로 훨씬 크고 화려합니다.

  높기 때문에 쓰러질 염려가 있어 쇠줄 4개를 이용하여 앞뒤로 고정시켰습니다.
상인방과 하인방 사이에 두 줄로 살창을 냈습니다.
하인방 아래와 기둥에 "ㄷ'자 모양으로 운각판(雲刻板)을 붙여 튼튼하면서 동시에 화려해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기둥 3면에 붙여 세운 문벽선도 구름문을 넣어 현란합니다.

  영조문(迎詔門)이란 현판을 걸었으나 중종 34년(1539)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지적으로 영은문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영은문은 조선의 국왕이 중국사신을 영접하고 배웅하는 장소였습니다.
영은문에는 약소국인 조선의 설움이 배어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횡포는 대단하였습니다.
이를 달래기 위하여 많은 재물로 무마를 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신을 선발할 때 가난한자를 골라서 보냈다고도 합니다. 

  당시 중국은 공물뿐만 아니라 조선의 처녀들까지 조공으로 바치게 강요합니다.
평민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의 딸도 선발을 합니다.
태종 8년(1408) 중국으로 보낼 처녀를 뽑는 자리에
평성군(平城君) 조견(趙?)의 딸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입을 실룩거리고,
이조참의(吏曹參議) 김천석(金天錫)의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軍資監) 이운로(李云老)의 딸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려 선발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화가 난 중국 사신 황엄(黃儼)은 아버지들을 귀양 보내고 파직을 시키도록 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이 영은문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할 때
부모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영은문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사신의 배웅을 나온 조선 국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청일전쟁이 끝난 후 고종 32년(1896), 모화관을 독립회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은문을 허물어 버리며 그 앞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웁니다.
이때 영은문의 주춧돌을 남긴 것은
치욕을 기억하고 자주를 위하여 국력을 키우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중앙일보 2월 16일자 칼럼입니다.


중국의 국력이 커지고
반미에 친중을 외치는 세력을 보며
또다시 영은문을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어 올려보았습니다.

출처 : 청정남
글쓴이 : 청정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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