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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대용의 중국어 공부 [강명관]

문근영 2012. 10. 21. 07:42

제 239 호
홍대용의 중국어 공부
강 명 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중국은 조선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나라였기에 중국어 역시 가장 중요한 외국어였다. 세종과 성종은 양반관료들에게 중국어의 학습을 권장하였고, 때로는 강요하기조차 하였다. 그 결과 조선전기의 양반들 중에는 중국어를 제법 괜찮게 구사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양반관료 대부분은 외국어 통역을 기능적인 것으로 여겨 천시했고, 그 결과 중국어를 비롯한 일본어ㆍ여진어ㆍ고어의 학습은 소수 역관의 전유물이 되었다. 사신단이 중국에 파견되어도, 삼사(三使)는 중국인과 대화할 수가 없었고, 오직 역관의 통역에만 의지하였다. 통역의 입만 쳐다보는 외교가 잘 될 리가 없다. 대중국(對中國) 외교에 숱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여러 기록이 증언하고 있다.

중국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맹렬한 중국어 학습

홍대용은 1765년 겨울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오랫동안 준비를 하였다. 중국어부터 익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에 한번 (북경을) 보기를 원하여 매일 근력과 정도(正道)를 힘써 고치고, 역관을 만나면 한음(漢音)과 한어(漢語)를 배워 기회를 만날 때 한번 쓰고자 하였다.”(을병연행록) 불과 서너 달의 중국 체류를 위해 이처럼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던 양반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착실히 준비를 하던 중 숙부 홍억(洪檍)이 1765년 6월 서장관에 임명되자, 홍대용은 드디어 중국어를 써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11월 2일 서울을 떠나 7일 봉산(鳳山)에 묵었을 때 부사(府使) 이응혁(李應爀)은 홍대용에게 자신이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의 경험을 전하며 중국어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책문(柵門)을 든 후에는 한어(중국어)를 못하면 곳곳에서 남의 입을 빌리어 답답한 구석이 많고 구경도 잘할 길이 없으니, 부디 미리 알면 좋을 것입니다. 길에 가며 온갖 기명(器皿)의 이름을 묻고 약간 아는 말로 수작하면 자연히 익혀지니, 나는 돌아올 때 역관의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다.”(을병연행록)

이응혁은 중국어로 몇 마디 말을 건넸다. 홍대용은 역시 중국어로 대답했을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자 홍대용은 중국인과 만나면 예외 없이 중국어를 썼다. 그의 중국어 실력은 어떠했을까? 12월 8일 심양에 도착하여 심양부학(瀋陽府學)의 조교(助敎)인 납영수(拉永壽) 집을 숙소로 삼았을 때다. 납영수는 홍대용에게 조선의 과거제도와 벼슬에 대해 물었고, 홍대용은 모두 중국어로 대답하였다. 납영수는 자기 아들에게 “처음 중국에 오셨는데, 어음(語音)이 분명하니, 정말 총명하신 분이다.”(「납조교(拉助敎)」, 연기(燕記))라고 홍대용의 중국어를 평가한다. 서울서 배운 홍대용의 중국어 실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왜 외국어를 공부하는지, 홍대용의 고민과 포부를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중국어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오랫동안 한 번 중국을 유람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중국어 익힘 책을 보고 중국어를 공부해온 지 몇 해였다. 하지만 책문(柵門)을 통과한 뒤로 일상의 예삿말조차 전혀 알아듣지 못해 당황스럽고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부터 수레를 타면 왕문거(王文擧, 홍대용의 수레몰이꾼)와 종일 대화를 나누고, 객점(客店)에 들면 주인 남녀를 불러 억지로 화제를 꺼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였다. 심양에서도 납조교(拉助敎) 부자와 온갖 이야기를 다 했지만, 필담(筆談)은 하지 않았다. 북경에 도착해서는 거리를 두루 다니며 어떤 경우에도 중국어를 써서 발음이 더욱 익숙해졌다. 하지만 문자나 깊은 뜻을 가진 말, 그리고 남방의 선비의 말은 마치 귀머거리나 벙어리가 된 듯 정신이 아득할 뿐이었다.”(「연로기략(沿路記略)」, 연기)

중국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상적 대화는 가능했지만, 문자에 관계된 말, 곧 문언(文言)으로 이루어진 지적 언어, 깊은 의미를 갖는 말, 남방, 곧 강남(江南)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천주당의 서양인 신부와, 강남 출신의 중국 지식인 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均)과 필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대학의 방학이 시작되자 학생들이 너나없이 영어 공부에 몰두한다. 홍대용의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외국어인 중국어를 익히지 않아 문제더니, 지금은 영어만 익혀 문제다. 그나저나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홍대용의 고민과 포부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인가. 정말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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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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