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시

기억의 지문 / 문근영

문근영 2012. 5. 18. 23:55

기억의 지문 / 문근영

 

 

인쇄된 활자의 잉크처럼 건조한 의식만

남은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빈방에 갇혀 있다

문을 여는 사이

틈에 낀 여자가 눈을 깜박거리며

걸어 나온다

 

불빛이 훑어 지나간 자리마다

몇 잎 훈기가 빈방을 적시고

등뼈를 들썩이며 또 하나의 여자가 걸어 나온다

 

지문을 찍듯, 몸에 저장된 기억의 흔적도

고스란히 재생되고

바람이 뜨겁게 모든 것을 붙잡고 있었으므로

수없이 씹어 삼킨 시간의 흔적들

흑백사진의 낯익은 풍경으로 일렁인다

 

해상도가 떨어져 선명하지 못한 실수 그때,

완벽을 닮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소복이 쌓여가는 A4 용지들

사본은 아직 원본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너에게로 달려가는 기억과 밀려오는 표정 사이에서

과연, 나는 어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잘못 눌린 버튼이 뱉어놓은 흐릿한 여자가,

기억의 지문을 바람 잎잎이 적시고

반복적 리듬 속에 갇힌 수만 개의 해독 불가능한

생을 암호처럼 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