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
최영철
물이 죽었다
앓지도 않고 못 살겠다 소리치지도 않고
다소곳 물이 죽었다
목마른 어디로부터 급한 전갈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던 중이었다
달려가다 엎어진 것이었다
왕진가방 풀어헤치고 구급약을 바닥에 쏟았다
벌컥벌컥 속살까지 환하던 투명한 눈
어둡게 감겼다
이제 더 이상 갈 데 없다
갈 길 찾지 못하겠다고 웅덩이에 주저앉았다
맥을 놓고 통곡한 사지가 썩고 있다
돌부리에 찢기며 수천수만리
홀로 꼬꾸라졌다
누가 가래침을 뱉었다
오줌을 갈겼다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들이키던 물의 몸
시커먼 수의에 덮였다
헌화라도 하듯 경의라도 표하듯
담배꽁초 비닐 부스러기 바쳐졌다
초승달 달빛에 썩은 물의 혼령 어른거린다
승천하지 못하고 시커먼 얼굴로 숨이 끊겼다
여기서 죽자
더 가봐야 갈 데도 없다
갈 데도 없는 길을 가서 무엇해
이리 와 죽자 나하고 죽자
『불교문예』(2011년, 겨울호)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서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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