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최영철] 검은 물

문근영 2011. 12. 28. 11:51

 

 

   검은 물

 

최영철

 

 

 

물이 죽었다

앓지도 않고 못 살겠다 소리치지도 않고

다소곳 물이 죽었다

목마른 어디로부터 급한 전갈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던 중이었다

달려가다 엎어진 것이었다

왕진가방 풀어헤치고 구급약을 바닥에 쏟았다

벌컥벌컥 속살까지 환하던 투명한 눈

어둡게 감겼다

이제 더 이상 갈 데 없다

갈 길 찾지 못하겠다고 웅덩이에 주저앉았다

맥을 놓고 통곡한 사지가 썩고 있다

돌부리에 찢기며 수천수만리

홀로 꼬꾸라졌다

누가 가래침을 뱉었다

오줌을 갈겼다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들이키던 물의 몸

시커먼 수의에 덮였다

헌화라도 하듯 경의라도 표하듯

담배꽁초 비닐 부스러기 바쳐졌다

초승달 달빛에 썩은 물의 혼령 어른거린다

승천하지 못하고 시커먼 얼굴로 숨이 끊겼다

여기서 죽자

더 가봐야 갈 데도 없다

갈 데도 없는 길을 가서 무엇해

이리 와 죽자 나하고 죽자

 

 

 

                          『불교문예』(2011년, 겨울호)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서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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