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일두 정여창고택

문근영 2011. 12. 16. 11:42

 

 일두 정여창고택의 소슬대문채

 

  일두종택  정炳鎬           충효전가  정宜均

 

  정려문 5액이 걸려있다

 

 사랑채 누마루에서의 소슬대문채

 

  함양읍 상림내의 일두 정여창像

 

 사랑채

 

  사랑채앞 벽 충효절의

 

 누마루의 편액 탁청정

 

  안채로 출입하기위한 일각문

 

  사랑채측마루앞에가설된 소변통 (사랑 어르신네들이 사용하던것이라한다.

 

  안채로들어가는길

  안채에서 안채사랑채로 출입하는 일각문과 사랑채측후면

 

  사랑채누마루앞에 설치된 석가산

 

 바같곳간채

 

  안채로들어가는문턱 휘어진 하방 자연목재

 

 안곳간채

 

 안곳간채배면,  통풍과 온습도유지를 배려한 목판벽이 2단으로 구성되었다

 

  안아래채

 

  안채

 안채의 대청

 

 안채의 머름대

 

 안채 부엌칸

 

 안채의 배면 툇마루-장독대

 

 안사랑과 안채를 드나드는 일각문

 

 안채 뒷간

 

 곡간채

 

 사당(가묘)

 

안사랑채

일두 정여창고댁(一? 鄭汝昌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86호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정여창(鄭汝昌):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호: 일두(一?). 자: 백욱(伯?). 시호: 문헌(文獻). 본관 河東. 출생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사적499호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정여창, 정경부인 묘소    경남도  기념물 제268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의 손자로,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의 아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고,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岳陽洞에 들어가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곧 세금에 있음을 알고 백성이 마땅히 편하게 살아야할 10가지 규칙이 便宜數十條이다.

 

안의 光風樓: 빛을 실어 전국에 골고루 나른다는 큰 뜻으로

                  만백성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 위아래가 없는 나라, 백성이 곧 주인이 되는 나라.

 

1498년 무오사화 때 경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 상주의 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유집.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金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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