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정여창 묘소

문근영 2011. 12. 14. 11:14

 

 함양 상림공원 역사인물공원의 일두상

 

 낮은 언덕구릉을 올라서면 앞에는 일두 정여창의 묘소가 자리하고 그 뒤에는 부인의 묘소가 자리한다

 

 유명조선국일두정여창선생지묘

 

 

 좌우 문인석

 

 비석의 두전은 '증 우의정 문헌공 일두 정선생 신도비명(贈右議政文獻公一?鄭先生神道碑銘)'이라 되어 있고, 비액제(碑額題)는 '유명 조선국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 사시 문헌공 일두 정선생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諡文獻公一?鄭先生神道碑銘幷序)'로 되어 있다.

 

 귀부 입을 벌리고 미소를 머금고있는 비좌 귀부의 얼굴

 

 양쪽에 세워진 팔각석주옆에는 철로만든 원형고리가 달려있는데... 극락문고리인지 !!!

 

 석양

 

 봉분의 면석 앞면에 좌우와 가운데에 삼태극이 조각되어있다

 

 

 정렬부인 완산이씨지묘

 

 

일두 정여창과  정경부인 묘소     경남도  기념물 제268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승안산 하동 정씨의 묘지공원 양지바른 언덕바지에 일두 정여창의 부부 묘소가 있다.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리학에 있어 점필재 김종직으로부터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배워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나중에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성종 21년(14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 세자시강원 설서(設書, 세자의 스승),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 연산군 4년(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되어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되어 1504년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하기도 하였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년)에는 김광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 사림을 대표하는 그의 묘소에는 온화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문인석 또한 순한 표정을 지은 채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다.
신도비는 1689년 3월 각자(鄭元夫와 僧 三悅)세운 것으로, 비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한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 지었다.
두전(頭篆,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 및 비문 전체의 글씨는 이조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른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또한 일두 정여창과 부인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소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소
정여창 묘소 바로 위에는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이씨 묘소가 있다.

정여창의 묘소와 비슷하나 石羊과 낮으마한 팔각석주가 없으며, 봉분전면의 삼태극문양이 없다.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金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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