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학사루

문근영 2011. 12. 12. 11:54

 

 

 

 

 

 

 

 

 

 

 

 

 

 

 

학사루(學士樓)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1-15   군청앞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랐다 하여 학사루라 불리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숙종 18년(1692)에 다시 지었다고 전하며, 1979년에 지금의 위치인 함양군청 정문 앞에 옮겨 지었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붕 옆 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이 학사루의 건축년대는 미상이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先生)이 태수(太守)로 있을 때

이곳에 올랐다고 전하여진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창건된 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탄 것을 숙종(肅宗) 18년(1692)에 중건한 기록이 이전(移轉) 복원할 때 발견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이곳에 걸린 유자광(柳子光)의 현판으로 김종직(金宗直)과 사적(私的) 원한이 생겨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의

요인이 되기도 한 곳이다.

원래 조선시대(朝鮮時代) 객사(客舍)자리인 현 함양국민학교 안에 있었던 것을 1979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한 것이다.

조선초 사림파의 종사로 명성이 높은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랐다.
그때 고향이 남원인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왔다가 써서 걸어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따위가 여기에 시를 걸수 있는가"라고

큰소리를 치며 현판을 불에 태워 버렷다.
이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속으로 분을 삼키며 보복의 날을 기다렸다.
유자광은 부윤 벼슬을 한 집인의 서자로 태어나 궁궐문을 지키던 일개 갑사였으나 이시애의 반란때 자청하여 싸움터에 나아가

출세의 길을 열었으며 남이장군등을 역모로 무고해 그공으로 군(君)에까지 올라 거들먹거린다하여 눈총을 받던 인물이다.

학사루에서 일어난 이현판사건은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학사루이건기
높은 山에서라야
깊고 맑은 물이 發源하는가
큰 물가 마다 기름진 물이 열린다
智異ㅁㅁ 정기내린 고장에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마음 고운 百姓이 모여 살았더니
부지런하고 바른 예절 물에 배여
萬 고을의 부러움을 사서
天ㅁ이라 불려 왔느니
삼한시대 ㅁㅁ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명현 석학이 줄지어 탄생했음이
결코 우연은 아니리니
산자수명한 물가마다 고루가 섰고
심산ㅁ곡에는 진리 깨우치려는
높은 뜻이 하늘로 솟구쳐
이조때는 팔대선생이 이 고장에 나고
좌안동 우함양으로 이름 떨쳤도다
동헌 마당에 일찌기 ?던 학사루는
선현들이 ㅁㅁㅁㅁ한 도량으로
고장의 큰 자랑거리 되더니
긴 세월 貳亂과 풍마에 ㅁㅁ한것을
숙종십팔년(1692)에 중건했음이라
지었다가 쓰러지고 다시 지은 학사루
지붕에는 이끼돋고 난간은 헐어진채
비바람에 시달린 ㅁㅁㅁㅁ지고
철부지들 발길 속에 옛 모습 잃음이
지나믄 이의 마음을 찢어 흔들고
ㅁ하기 힘든지라 안타까와만 하는
옴 군민의 바램을 모아
옛 성북 중앙 ㅁ는 터를 고르고
조상의 얼 기리고자
루를 옮겨 ㅁㅁ하나니
학사루 지은 뜻을 가없이 기리며
새 모습 담은 조상의 얼이어 텃밭에서
더 많은 샘 솟기 빌어
마음 가다듬고 이 문을 부치노라
一千九百七十九年 二月 十八日
함양군수 呂 ? 煥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金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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