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빈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문태준=1970년 경북 김천 출생.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등.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저 나비는 좋겠다.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열무꽃잎이어서. 열무꽃밭이어서. 살아오면서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 하나 없는 우리는 얼마나 가난하냐. 그 마음 얼마나 가난 하냐. 꽃잎 하나 곁에 두지 못한 우리는 얼마나 가난하냐. 우리도 가끔 열무밭을 열무꽃밭으로 만들어보자. 그러면 우리의 무릎도 따뜻해질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마음이 극빈에 가 닿았다. 성선경·시인
-[국제신문] 아침의 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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