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대마도 여행기 / 정홍택

문근영 2011. 7. 18. 07:36
대마도 여행기


대마도, 가깝고도 먼 섬, 미움 보다 친밀감이 들어 남의 땅 같지 않는 섬, 역사의 곳곳에 배여 있는 피치 못할 인연과 악연의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섬, 독도에 대한 억지 주장을 보면서 자꾸만 시선이 가는 섬, 지난 날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의 역사와 문화 흔적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대마도는 온통 산이어서 농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어려운 섬이다. 좁은 농토에서 얻은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고자 우리에게 구걸하다 시피 매달렸었다. 지난날 대마도주는 조선과 선린관계를 유지하여 식량 조달을 원활하게 하는 일이 최우선이었고 이러한 통로가 허물어지면 왜구의 본거지가 되어 노략질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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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거리, 이 개울에는 바다 고기가 무리지어 드나들며 살고 있다.

 

이런 연유로 대마도는 농경사회였던 조선이나 일본 모두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에게 식량을 대주어야 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 쓸모 있는 땅으로 여기지 않아 가까이 있는 이 섬의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일본이 임란 때 조선 침략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자기네 영토로 간주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료들을 보면 대마도가 조선 시대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 이성계가 대마도 정벌 출정식에서 ‘본래 대마도는 우리 땅이었으나 워낙 섬 자체가 척박해 그동안 방치했더니 왜구의 소굴이 되어 있어 이를 소탕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의 모든 지도를 봐도 예외 없이 조선 땅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작성한〈팔도총도(八道總圖)〉에도 대마도는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에도 막부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너희 섬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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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방역도와 대동여지에 표기된 대마도

 

임진왜란이 발발하려 하자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전쟁을 막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었다. 그들에게는 조선 침공보다는 식량문제가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 측 실무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대마도가 조선과 단절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젓줄을 끊어 놓은 것과 같다’라고 할 정도로 조선의 식량 원조는 그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대마도 도주는 스스로 조선과 일본 모두에 속한 섬이라고 인정하고 조선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었다.

 

해방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을 발표하면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삼았었다. 그때 일본의 요시다 총리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었으니, 만약에 맥아더가 우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면 대마도는 우리 땅이 되었을 줄도 모른다.

 

지금 대마도는 우월했던 우리 역사의 흔적들을 잘 간직하면서 우리가 남긴 것들이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한국인 단체관광객과 학생은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으며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 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은 우리와 선린을 유지하며 우리와 가까이 삶을 영위하려 하고 있다. 또한 미쓰(美津)에 붙여진 흥미로운 벽보에는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즈하라에 있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는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길이 16.58m짜리 두루마리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마을을 가르는 하천 옹벽에도 조선 통신사의 행렬도가 새겨져 있다. 세월은 흘러도 그들에게는 아직도 조선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이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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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옹벽에 새겨진 조선통신사행렬도 부조 

 

대마도는 우리나라 홍도나 흑산도, 울릉도처럼 수직 단애를 한 섬이다.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과 크고 작은 섬, 가파른 산, 산비탈 사이의 손바닥만한 좁고 척박한 땅에서 빌붙어 사는 마을과 사람들, 이런 삶의 터전이 전체 면적의 2%라니 식량 부족이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지난날에도 우리의 식량으로 삶을 유지했듯이 지금 우리 관광객들이 그들의 삶의 일부분을 해결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마도는 멀리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채 우리와 인연의 사슬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나보다.

 

그래서 인지 이 곳에는 입장료가 없다. 연 4만 명이 넘는 우리 관광객들이 대마도에 오는 것만으로 관광수입이 되기 때문에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호텔과 식당은 물론 면세점도 우리 관광객들로 인해 활기를 띠고 있으며, 이제는 한글 안내문도 보이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도 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을 대하다 보니 그들의 일본식 생활 문화가 조금씩 한국화 되어가는 모습도 보인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도 이즈하라였고 이 곳에서 일박을 했으며 이즈하라를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이즈하라는 대마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대마도 전체 인구 4만 명 중 70%인 3만 정도가 살고 있는 곳이다. 과거 험난한 뱃길을 따라 일본으로 왕래했던 신라, 고려 사신들과 조선통신사들은 이곳에서 여정의 피로를 풀고 일본 본토의 에도(지금의 동경)로 떠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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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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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을 세우고 과거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 환경 때문에 이즈하라 곳곳에 우리나라와 관련된 유적과 문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구한말 대 유학자이던 최익현 선생이 이곳에 유배되어 순국했으며(우리 일행은 최익현 선생의 넋을 기리며 묵념을 올렸었다) 고종의 왕녀 덕혜 옹주가 대마도 번주와 결혼하여 일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사실 덕혜옹주 봉축비 앞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일국의 공주를 이 작은 섬사람에게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켰던 일본인들의 간악함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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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옹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1931년 5월 대마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해 1962년 귀국 20년 만에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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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척왜 정신이 강했으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의병 활동을 하다 붙잡혀 이곳에 유배되어 단식을 하다 돌아 가셨다.

 

또한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던 고려문을 성터가 있던 자리로 옮겨 유적지로 관리하며, 임진왜란 이후의 약 200년간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통해 이루어 졌던 선린의 교류와 문화의 전수가 오늘에도 계속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대마도 주민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으며, 매년 8월이면 아리랑축제라 하여 한복을 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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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홍짱님의 부로그에서 빌려 왔습니다.

 

그래도 그 곳은 일본이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하고 청결했으며, 작고 오밀조밀했다. 티끌 하나 없는 도로며 집안 가꾸기며, 화단 가꾸기, 문 앞에 내놓은 화분들과 어우러진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골목을 거닐며 조금은 질투심이 나기도 했다. 집집마다 노랑 번호판의 소형 승용차를 보며 중대형을 선호하는 우리의 의식구조에 대한 성찰도 해 보았고, 험준한 산악을 넘나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협소한 도로를 넓히지 않고 힘들게 이용하는 그들의 자연관에 감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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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이고 꾸미는 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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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같은 단정하고 깨끗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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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번호판의 소형차,각종 혜택이 있다

 

이즈하라 읍내를 흐르는 작은 개울에 떼를 지어 유영하고 있는 바다고기들과 부유물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항구를 보며 그들의 철저한 자연관에 놀라기도 했다. 자연에 대한 높은 의식의 수준과 습관화된 실천의 의지의 결과일 것 같아서 말이다.

 

이튿날 이른 새벽 유명산(558)을 올랐다. 아침 시간 전에 다녀와야 했기에 바쁠 수밖에 없었다. 5시에 일어나 어둠을 헤치고 급히 서둘러 나선 것이다. 울울창창한 숲 은 우리나라 완도 상왕봉을 연상하면 된다. 동백과 후박나무와 가시나무, 참식나무, 산벗나무들이 주종을 이루었고, 정상부근에는 약간의 편백과 참나무, 서어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잘 조림된 삼나무 숲이 자연과 인공의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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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산의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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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말등처럼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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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타케의 암봉 바로 보인다

 

정상에 서니 대마의 등을 탄 기분이었다. 산정에는 마른 억새가 따뜻하게 깔려 있고 부드러운 산등 너머로. 사라타케의 암봉이 아침 햇살을 받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남쪽 바다위로 구름 속을 밀고 올라오는 아침 해와 작은 섬들이 정겨웠다. 잠을 밀어내고 어렵게 올랐던 유명산 등산은 내내 마음을 즐겁게 했다. 하산을 해서 토속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나니 일행들이 약속한 장소로 오고 있었다.

 

비록 북도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남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미자카공원에서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안과 올망졸망한 섬들을 내려다보았고, 쓰쓰자끼에서 무망의 대해와 암초에 부딪히는 파도를 바라보며 터지는 핸드폰을 들고 식구들에게 전화를 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어둠이 밀려오는 아유도미자연공원의 반석위에서 자연의 아늑함도 느껴 보았고, 돌아오는 길, 험준한 산등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행운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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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쓰자키 해안, 이곳에 가면 핸드폰이 터져
우리나라와 통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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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녁 아유도미 자연공원
울창한 숲과 반석위로 흐르는 계곡 물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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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정결한 농촌의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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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고개를 넘다 만난 일몰-일본처럼 칙칙하다.

 

마을 마다 모시고 있다는 신사며, 절과 무덤들이며, 깨끗한 시골집들이 인상적이었으나 나이 먹은 사람들과 곳곳에 비어 있는 빈집의 시골을 바라보며 삶은 어디나 마찬가지임을 알았다.

 

여행이란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바둥거리거나 시간 쪼개며 각박하게 사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조금은 여유롭고, 조금은 한가롭고, 조금은 빈둥거리듯 유유자적하며 마음을 비운 채 그 곳의 세계에 빠져 들어갈 줄 아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 것이 제대로 된 여행이다. 대마도,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그 곳에 살아 있고 힘들었던 역사는 다시 후손들에 의해 이어져 가고 있다. 술집도 유흥지도 없는 그래서 화려하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 역사를 더듬고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 보듬으며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2007.  2.  24      Fo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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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에 자리한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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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가꾸기는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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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안에 자리한 절의 묘지와 함께 삶이 영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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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같은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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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정식과 단무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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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내 논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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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산의 삼나무와 자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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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개울의 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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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비치된 분리수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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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절벽-대마도는 이런 해안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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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같이 깨끗한 이즈하라 항구

 

저의 홈페이지 '숲과 사람'(forman.pe.kr)에 가시면 모두 볼 수 있습니다.

Le Concerto De La Mer(바다의 협주곡) - Jean Claude Bor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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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홍 택 (011-608-9505)
 산, 숲, 야생화, 아름다운 자연 속에 꿈과 희망을~~!!
 
저의 홈페이지 숲과사람 (forman.pe.kr)에  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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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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