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할머니와 성경책
최 동 호
추석 대목 지나 발걸음
한산한
돈암동 시장 골목길
느른한 정적이 감도는 하오,
검은 가죽 표지
성경책 바로 옆에 펼쳐 놓고
파뿌리처럼 쓰러져 잠든 할머니
대문짝 활자가
돋보기안경에 넘칠 만큼 가득해,
앙상한 팔다리 웅크린
할머니, 하늘의 품에
안겨, 기도하다 잠든 아기처럼 포근하다
시인의 눈이 선택한 시장 골목길 풍경은 심플하고 특별하다. 시인의 어떤 마음과
계합된 따뜻함의 전염이 있다. 가죽 표지 성경책, 성경책 속의 대문짝만 한 활자,
돋보기안경이란 시장 골목의 물품이 아니다. 또 시장 골목 한산했다 해도 파 할머
니가 파를 팔아야지 돋보기 끼고 성경책 읽다가 하얀 파뿌리처럼 쓰러져 잠들어야
하는 강보 편 자리가 아니다. 생활의 생동과 소란, 삶의 신산함 같은 모드는 완전히
꺼진, 작지만 낯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기에 이 시는 빛나게 지어졌던 것.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을 하늘의 품인 양 안겨 잠든 파 할머니의 모습은 충분히 시인의 미
의식을 건드리고 미의식 속의 어떤 선한 의지를 돌올히 그려 올리게 했다. 개인적
으로 눈 어둔 노인들을 위해 성경이나 불경을 큰 글씨로 옮겨 쓰는 사경기도하는 분
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진명 . 시인>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꽃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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