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된 詩

[스크랩] [권현형] 밥이나 먹자, 꽃아

문근영 2011. 5. 24. 10:47

밥이나 먹자, 꽃아

 

권현형


나무가 자궁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읽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번도 밥을 함께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천년의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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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붉은 꽃떨기’가 쏟아지는 계절이다. 첫 연 꽃 피어나는 모습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허공을 찢으며’라고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긴 한설과 결빙의 혹한 지나왔기로서니 뭐, 순환하는 자연현상을 이렇게까지나 과하게? 그럴 만한 연유 있었다. 젊음의 순결했던 한때를 함께한 적 있었던 그의 부음이 날아왔기 때문. 사람의 말이든 시의 말이든 뒤까지 들어봐야 할 일. 만개한 봄꽃 속에서 아는 누구의 부음을 들어보라. 욕지기 같은 게 뭉클 쏟아질지도.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아름다운 회한의 구절 그렇게 태어나고, ‘혼자 큰 키(순수한 정신)를 앓던 사람아 꽃아’ 탄식 솟고. 일찍 간 너도 아팠겠지만, 오늘 나도 뿌리까지 아파 딴청을 한다. ‘일없다, 꽃아, 밥이나 먹자’고.

- <이진명·시인> /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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