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나 먹자, 꽃아
권현형 나무가 자궁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 전 자본론을 함께 읽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번도 밥을 함께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천년의시작, 2006)
- <이진명·시인> /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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