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
김 언
꽃들을 다 그리고도 남는 꽃들
나비가 앉았다 간 뒤에도 마저 흔들리는 나비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애벌레 기어오르다가 슬몃 흘리고 간 애벌레
바람이 핥고 가고 햇볕이 남김없이
빨아들이고도 남는 햇볕
살랑살랑 나뭇잎을 흔들고
떨어지는 나뭇잎; 모두가 여기 있고
아무도 밟지 않은 이 연기를 타고 올라간다
다 자란 뒤에도 더 자라는 뱀이 기어간다
-시집『소설을 쓰자』(민음사, 2009)
** 타동사가 지어낸 풍경이 있고 자동사가 이루어낸 풍경이 있다. 인간의 손을 탄 풍경은 타동사의 풍경이다. 정물의 대상이 된 꽃들, 완상의 대상이 된 나비, 감탄의 대상이 된 애벌레…가 그렇다. 이런 풍경의 주인은 인간이다. 그것참, 인간은 어디에나 손때를 묻히고 다니는구나. 그런데 그 너머에 자동사의 풍경이 있다.
그림 그리던 이가 떠난 후에도 피어 있는 꽃들과 나비 떠난 뒤에도 흔들리는 나비(=꽃자리)와 성충이 되고 남은 허물(=흘린 애벌레)…이 그렇다. 그 풍경의 주인은 풍경 자신이다. 풍경은 인간이 떠난 곳에서도 스스로 흔들리고 넘치며 자라난다. 그것참, 풍경은 취객과 같아서 아무데서나 속엣것을 쏟아내는구나.
시인은 때 묻은 손으로 풍경을 더듬는 자다. 그의 손은 저 자동사의 풍경에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 한계를 그음으로써 한계 너머의 어떤 경지를 지시할 수는 있다.
- 권혁웅(시인) /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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