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배영옥
동구시장 공중화장실 여닫이문에 둥근 자국이 나 있다
연두색 칠이 환하게 닳아있다
손바닥 온기와 급하게 서두르는 힘이 만든 자취,
사람들은 제 손바닥으로 그 곳을
밀고 갔을 것이다
밀어내도 밀어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닫이문은
자기도 모르게
저런 흔적을 받아 안은 것인데, 그 자국 또한
중심에서 거리가 한참 멀어서
여닫이문은, 바닥에서 짐짓 한 뼘쯤 떠올라 있다
-시집 『뭇별이 총총』(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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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나 여러 차례 사용한 것이면 자국이 생긴다. 더 오래되면 움푹 파인 흔적이 남는다. 화장실 손잡이는 말할 나위 없겠지. 그처럼 닳고 닳아 둥근 자국이 난 곳 또 어디 없을까. 정작 우리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드나드는 곳은 어디일까. 머릿속 아닐까. 하루 한 시간에도 수백 번 생각의 창들이 수시로 열리고 닫히는 곳. 만약 머릿속에 중문이 있다면 그 문의 손잡이는 얼마나 닳고 닳았으랴. 우리의 생각이나 고민들이 잠들지 않는 한 끊임없이 밀고 드는 문.
그리하여 머릿속 중문 손잡이에도 둥글게 흔적이 나 있다면, 나 그 흔적들을 고이 받아들이리라. 더구나 그 흔적들이 리비아 유혈사태니 침출수니 치솟는 물가니 이런 단어들이 아니라 카프카나 릴케, 틱낫한의 말씀들이 들락거려 움푹 패었다면 나 은총인 듯 받아 안으리라. 가령 “우리가 진정으로 꽃 한 송이를 깊게 만지면 우주를 만지는 것이다”와 같은 말이라면, 아아 그아름다운 흔적이라면 머리가 총알받이가 되어도 좋으리라.
- 매일신문[이규리의 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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