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결고리, <오주연문장전산고>
신 병 주(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이제까지 19세기를 보는 시각은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로 인한 외척 세력의 권력 독점과 이에 파생하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지고 이에 의해 민란이 일어나는 시기로 주로 이해되었다. 물론 정치, 사회적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음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18세기 이후 풍미했던 실학과 북학의 흐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그 내부에서 축적되어진 학문적 성과와 청의 고증학의 영향, 그리고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상풍토의 조성 등으로 학문과 사상의 폭과 깊이에서는 현저한 성과를 보인 시기였다. 특히 양란이후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국가의 통치나 민생에 필요한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하는 박학(博學)의 풍조가 사상계의 일단을 형성하고 이러한 흐름들이 지속되면서 백과사전적인 학풍이 일어났다. 최한기의 <명남루총서>, 이유원의 <임하필기>등과 함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적 저술이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 백과사전
이규경의 본관은 전주, 호는 ‘오주(五洲)’로 그의 호를 ‘오대양 육대주’에서 따온 사실이 흥미롭다. 열린 사고를 하고 있었던 학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조부는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문명을 떨친 이덕무였고, 아버지 이광규 역시 규장각 검서관이었다. 따라서 이규경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굴레 때문에 중앙의 정계에서는 활약하지 못하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재야의 은둔자가 아니라 신학문의 수용에 언제나 민감하였고,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처지에 있었던 중인 학자인 최한기, 최성환, 김정호와의 교류를 통해 학문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최한기는 <해국도지>, <영환지략>등 당시 서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던 최신 서적을 이규경에게 보여 주었으며, 최성환은 지리학에 해박하여 <여도비지(輿圖備志)>를 편찬하였다. 이규경은 <대동여지도>의 제작자 김정호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여 그의 <여지도>와 <방여고>2책은 꼭 전할만한 것으로 평가할 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이규경의 학문 형성에는 신학문인 청나라 고증학의 수용과 최한기, 최성환, 김정호와 같은 중인층 학자와의 교류를 통해 얻은 지리학과 지도 지식 이외에 조선사회 내부에서 꾸준히 계승되어온 백과사전적 학풍이 큰 몫을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은 실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술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자신의 호 ‘오주’에, 저자의 겸손함을 뜻하는 거친 문장이라는 ‘연문(衍文)’, 문장의 형태인 ‘장전(長箋)’, 흩어진 원고라는 뜻의 ‘산고(散稿)’가 합쳐진 말로 제목에서부터 백과사전임이 나타난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총 60권 60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루고 있는 내용은 총 1,417항목에 달한다. 모든 항목을 변증설로 처리하여 세밀한 문제까지 고증학적 학문태도로 일관한 것이 특징이다. 고증을 원칙으로 하여 저자의 주관적 견해가 피력된 변증설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이규경은 서문에서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이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히 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병법·광물·초목·어충·의학·농업·화폐 등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호를 ‘오주’라 할 만큼 서양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이미 지적했지만 ‘용기(用氣)변증설’, ‘백인(白人)변증설’, ‘지구변증설’, ‘척사교(斥邪敎)변증설’ 등의 저술에서도 구체화되어 있다. 그는 변증설 가운데 약 80항목에 걸쳐 서학을 직접, 간접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그가 변증한 서학 관련 항목은 천문, 역산, 수학, 의약, 종교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참고한 서학 관련 서적들은 <천주실의>, <직방외기>를 위시하여 근 20종에 달하였다.
동도서기(東道西器)를 통해 부국과 통상을 지향
이규경은 서양문명과 중국문명을 비교하여 중국의 학문은 형이상학의 도(道)로, 서양의 학문은 형이하학의 기(器)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기를 잘 이용한 서양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 중국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동양사회의 과학적 전통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결국 전통사상의 바탕 위에서 부강한 국가를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사상적 개방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동도서기(東道西器) 사상에 바탕하여 개국통상을 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이규경은 관직에 종사하지 않고 평생을 농촌에 은거하였다. 학통상으로는 북학파와 연결되고 있었으나. 그가 처했던 위치가 농촌의 재야 지식인이었던 만큼 농민의 생활안정과 농촌문제의 해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비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음을 들어 무엇보다 농업이 생명의 근본임을 강조하였고, 농가의 월령에 대한 변증설과 구황식물로서 고구마의 중요성을 언급한 ‘북저(北藷)변증설’을 비롯하여, 농구와 직조지구, 어구 등 농어민의 실생활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이규경의 사상적 지향점은 무엇보다 부국(富國)과 통상(通商)에 있었다. 우리 국토에 소장되어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잠재되어 있는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여 잘 살고 선진적인 국가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도량형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화폐의 유용성을 타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장의 유래와 기능을 소개한 것에서 출발하여 개국통상론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장시변증설’에서는 전국의 장날을 통일할 것을 주장하고 투기와 고리대의 폐단이 없는 상업의 발달을 추구하였으며, 서양과 중국과 통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 서양의 선박들과 무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을 통해서 서양과의 적극적인 개국통상론을 주장하였다.
18세기 후반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에서 일부 전개되었던 서학 수용과 대외개방의 전진적인 역사 인식이 19세기 중엽 이규경, 최한기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은 19세기 중, 후반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로 이어지면서 초기 개화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규경은 18세기 북학파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지점에 있었던 학자로 평가할 수가 있다.
글쓴이 / 신병주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 저서 :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