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실학과 아동****

문근영 2010. 7. 23. 06:34

제44호 (2007.5.9)


실학과 아동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중국 16세기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동심설」에서, 모든 가식과 규범을 벗어나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성장하면서 견문과 독서경험을 쌓아 천진함을 잃어버리고는 도리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질타한 것이다. 서양에서도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무지개(A Rainbow)」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 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이라고 노래하였다. 천생의 경건함, 혹은 일상사에서 느끼는 경건함이 이미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탁오나 워즈워드를 먼저 배워서 그런지, 대학 때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중편소설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을 읽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 소설은 어린이가 악령에 사로잡힌 존재일 수 있음을 말하였다. 곧, 시골 영지에서 살아가는 고아 남매인 마일즈와 플로라는 집주인의 시종이었던 퀸트의 유령과 전임 가정교사였던 제슬 양의 유령에게 혼을 빼앗긴 존재들이었다. 1999년에 벤 볼트 감독이 심리학적 서스펜스 영화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소설을 어떻게 변형하였는지 궁금하다.


근대 이전, 어린이는 가족의 중심 아니었다
 

이렇듯 상반된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어린이는 순선(純善)의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화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후에야 비로소 어린이들은 가족의 애정의 중심이며 애정 표현의 으뜸가는 대상으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근대 이후로 가족 성원이 어린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당할 뿐 아니라 의무가 되었으며, 어린이는 여성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가정을 안락함과 친밀함의 영역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필립 아리에스 · 조르주 뒤비 책임 편집, 앙투안 프로 · 게라르 뱅상 편집, 김기림 옮김, 『사생활의 역사』 5, 새물결, p.904).  


전근대의 우리 사회에서도 어린이는 가족 구성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을까? 사대부가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식자(識字) 교육과 예절 교육을 시켰지만, 어린이를 가족구조의 중심에 둔 것 같지는 않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을 특별히 만들거나 아동의 작품을 단행(單行)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대부의 문집 속에 동몽시(童蒙詩)가 들어 있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조숙한 천재성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이나 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차이가 없겠으나, 전근대에는 어린이를 가족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생활의 반영적 측면이 강한 국문소설이 아동의 성장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길동이는 길을 떠나고 조웅은 대자보를 붙여 현실을 비판하였다. 가문소설의 대부분은 어린이를 가문 대 가문의 결합에 이용하고, 몸만 작은 성인으로 그려보였을 따름이다. 여성이 어린이를 교육한 사례는 많지만 순전히 어린이 때문에 헌신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후기, 어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 토로한 글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유배를 가거나 혹독한 가난(家難)을 겪은 사람들 중에, 어린 자식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한 예가 있다. 적어도 추억 속에서나마 어린이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식(李植)은 「죽은 아이 노농의 광지명 병서(亡兒老農壙誌銘竝序)」에서 요절한 아들을 애도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은 시집 가 한 해 만에 죽은 셋째 딸 운정(雲貞)을 위해 「망아오씨부묘지명(亡兒吳氏婦墓誌銘)」를 지으면서 그녀의 천진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다. 이 글들은 명나라 말기의 고문가 귀유광(歸有光)이 「여이이광지(女二二壙誌)」와 비견되는 명문들이다.


더 나아가 이른바 실학의 시대를 살았던 강화학파의 학자인 이광사(李匡師)는 을해옥사로 부령에 유배 간 뒤에 여덟 살 딸을 위해 장문의 시를 적어, 소꿉장난하던 따님의 재롱에 몸을 맡겼던 그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였다. 곧 1756년에 쓴 「이월 그믐에 감기 기운이 있어서 베개에 누워있자니 어린 딸이 곱절이나 생각나서 마음을 추릴 수 없어 무릎 주위에 맴돌며 재롱을 부리던 모습이 삼삼하므로 병든 몸을 간신히 일으켜 누워서 시를 초하여 인편을 기다렸다가 멀리 부치고자 한다(二月晦日感疾伏枕 倍念幼女 情不自聊 繞膝牽 嬌憐在目 病臥草 須便遠寄)」라는 제목의 500자 시가 그것이다. 그는 딸이 하도 귀여워서 날이면 날마다 집안에만 있고 피치 못할 일 아니고는 나들이도 하지 않았으며, 손님이 와서 온종일 가지 않으면 마음이 답답해서 견디질 못했다고 하였다. 딸은 “풀잎에 손톱으로 무늬를 놓아/ 비단이라 이름 지어 장사 시늉하고/ 고운 모래로 구슬을 삼고 / 색종이는 오려서 옷을 만들고 / 나무 조각으로 집을 얽어/ 바리 굽에 옹기솥 가마솥 앉히고/ 반드시 어린 부부가 있어/ 멀리 서서 내외를 정해두었다.”  어린이를 어린이로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었으랴.

 

한편 정약용(丁若鏞)은 1802년에 죽은 세 살배기 농아(農兒)를 위해 귀양지에서 「농아광지(農兒壙誌)」를 지어 마재 집으로 보내 큰 아들더러 아이의 영전에 읽어주라고 시켰다. 부인 풍산 홍씨는 1780년에 낙태를 하고 1799년에 농아를 낳을 때까지 열 명의 아이를 가졌고 일곱 아이들을 잃었다. 정약용은 “삼동이 다음 애는 이름도 짓지 못했고, 구장이와 효순이는 두척(斗尺)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두척의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쩔거나!”라고 울부짖었다. 


전근대에 어린이가 8세부터 11세 사이에 죽는 것을 하상(下 )이라 하고 그 나이 이상의 죽음에 대해서는 복을 입어 준다. 하지만 그보다 어린 나이로 죽은 아이들을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고 『의례(儀禮)』「상복(喪服)」에 나와 있다. 여덟 살 이하에 죽은 아이는 조그만 널에다 넣어 장사지내고, 입다 남은 옷가지를 상자 속에 넣어 기일에 제사 지내주었으나, 묘는 제대로 쓰지 않았던 듯하다. 정약용은 「농아광지」의 글 뒤에 후지(後識)를 적어서, 같은 남인 계열의 인사였던 이기양(李基讓)의 말을 인용하여, 요절한 자녀들은 당연히 그 애들의 생년월일과 이름, 생김새, 및 죽은 해의 날짜를 적어 두어 뒷날의 증거가 될 수 있게 하고 그 애들이 태어난 흔적이 남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일부 지식인들이 어린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갖게 되어서, 요절한 아이들도 각별한 방식으로 애도하였다고 생각된다. 


목민심서에 담긴 정약용의 어린이 사랑
 

그래서였을까, 정약용은 『목민심서』(1821년 완성)의 제4장 애민편(愛民篇)에 ‘자유(慈幼)’의 항목을 두었다. 곧 애민편은 양로(養老)·자유(慈幼)·진궁(振窮)·애상(哀喪)·관질(寬疾)·구재(救災)의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두 번째에 고아들을 보살피는 문제를 다룬 이  항목을 둔 것이다. 정약용은, 기민(饑民)의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조례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지만 양자 들이는 풍습이 정착되지 않아 어린이들이 유랑하게 되는 현실을 가슴아파하였다.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자식을 낳아도 거두지 못하니 그들을 타이르고 아이들을 길러서 우리 자녀들을 보전케 해야 할 것이다. 흉년 든 해에는 자식 내버리기를 물건 버리듯 하는데, 그 아이들을 거두어주고 길러주어 백성의 부모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에도 거두어 기른 아이를 자식으로 삼거나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하여 그 조례가 상세하고도 치밀하다. 만약 기근이 든 해가 아닌데도 유기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사람을 구하여 거두어 기르게 하되, 관아에서 양식을 보조해야 한다.”


또 서울 성 안의 개천에는 아이를 유기하는 일이 간간이 있었는데, 대개 사생아에 속한 아이들이 많았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이치가 그 부모의 죄를 그 아이에게 미치게 하지는 않으므로, 이 역시 마땅히 거두어 길러서 백성들이 자식을 삼거나 노비로 삼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번번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는 한다. 『맹자』는 “老吾老하여 以及人之老하며 幼吾幼하여 以及人之幼면 天下를 可運於掌이라” (편집주)고, 추은(推恩)을 강조하였다. 정약용은 나의 어린이를 어린이로서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기민의 버려진 아이, 사생아로서 버려진 아이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거두어 기르는 정책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것을 촉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어린이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는 기이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요술피리를 불어 쥐들을 없애버렸으나 시장으로부터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한 자가 어린이들을 데리고 갔는지 모른다고 상상하고는 한다. 물론 어린이처럼 보이는 작은 사람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표정의 어린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사회 전체가 온통 요술피리를 불어대어 어린이의 웃음을 빼앗아가서 그런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 우리 아이들을 대리만족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여 본다.



(편집주)

내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남의 노인을 존경하며, 내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어린이를 사랑한다면, 천하를 손에 쥐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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