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 (石南寺)
경기도 안성시 서운산(서운산) 기슭에 있는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석선스님이 세우고, 고려 광종 4년(953)에 혜거국사가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으나 화덕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大雄殿
조선 영조 1년(1725)에 해원선사가 대웅전과 영산전의 기와를 갈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 雍正 4(三)年乙巳 三月日 造成 "이라고 쓰여진 대웅전 숫기와가 발견되어 1725년에 대웅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8년에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겼다.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1층이며, 측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의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모서리를 장식한 공포로 보아 원래 지붕은 측면이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었으나, 후에 맞배지붕으로 구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과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세웠다. 기둥은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모습을 살려 다듬었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다. 공포는 내2출목, 외2출목의 다포계로 구성하였으며 맞배집이면서도 귀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영산전 靈山殿 .. 보물 제823호
1985년에 보물 제823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영산전 앞에 대웅전이 있었는데 1978년 풍수지리설에 따른 주지의 의견에 따라 영산전 뒤에 새로 터를 조성하여 대웅전을 옮겨 지었다. 지금의 영산전은 1940년에 보수하였고, 1989년에 실측 조사하였다.
영산전의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지어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공포의 특성을 갖추고 있는 건물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공포와 구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7세기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주칸은 모두 동일하다. 정면 가운데 칸 주간포 앞에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정면 3칸은 2짝의 문을 달았는데 문짝은 아래에 궁판을 두고 격자로 살을 짰다. 측면은 동쪽에만 1짝의 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벽을 들였다.
기단은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얕게 쌓았으며 평지에 있어 계단은 없고 기단의 바닥은 강회를 발랐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는데 기둥자리만 평평하게 다듬고 기둥의 하부를 그랭이질하여 세웠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治木한 原柱로, 귓기둥이 평주보다 굵다. 기둥머리에 창방을 걸고 다시 평방을 놓은 다음 포를 넣었다.
모서리는 이방을 설치하고 공포를 짜 올렸다. 포는 내외 2출목으로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이며, 살미, 첨차는 쇠서형이다. 귀포는 귀한대만 살미형으로 만들고 좌대와 우대는교두형이다. 주상포 사이에 주간포를 1구 씩 짜 올렸다. 포벽에는 연화대좌 위에 앉은 불상을 1구씩 그려 넣었다. 쇠서 모양을 볼 때 조선초기의 특징을 갖고 있으나 구조와 결구기법 등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17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요사채에서 대웅전을 향하는 계단의 좌우에는 석탑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경기도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고려 말 조선 초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재빌은 청회색이 감도는 화강암이며 높이는 서로 약간 달라 각각 2.26m와 2.32m이다.
동쪽에 있는 탑은 영산전 쪽에 서 있다. 1매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만들었으며, 1 단의 괴임을 두었다. 그 위에 홀린 중대석에는 가는 線刻으로 우주(隅柱)를 표현하였으며, 갑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판석 1매로 만들었다.
1층 옥신은 한쪽 면에 형식적인감실(龕室)을 두었는데, 양옆과 위아래를 놔두고 가운데에는 조금 파내어 도드라지게 하였다. 옥개석에는 3단의 층급받침이 있으며, 나머ㅂ지 옥신도 우주가 새겨진 1매의 돌로 만들었다. 그러나 3층 옥개석은 갑석과 비슷한 형태이며 이 위에 얹혀진 것은 노반(露盤)과 북발(覆鉢)로 보인다.
서쪽에 있는 탑은 1매의 지대석으로 되었는데, 3층의 층급받침이 있고 그 위에 그대로 우주(隅柱)가 있는 기단을 놓았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원래 서쪽의 탑은 현재 모습보다 좀 더 크고 다양한 형태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복발 위에 다시 옥개석이 얹혀져 있는 것도 보통의 석탑에는 없는 양식이다. 그러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옥개석의 형태나 屋身등에 나타나 있는 형식은 고려시대 말기 혹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충분하게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은중경탑 父母恩重經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란 ?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으로 불리우는 불경(佛經)으로,부모의 은혜의 높고 넓음과 이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으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을 거쳐 전래되면서, 유교적(儒敎的)인 효(孝)를 배척하지 않고, 불교적인 효도를 설한 경전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길을 가다가 한 무더기의 뼈를 보고 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어머니가 자식을 잉태하는 10개월 동안의 태아의 상태를 생태학적으로 설명하고, 부모의 10대 은혜와 은혜를 저버리는 불효한 행동, 부모 은혜의 갚기의 어려움, 불효한 자의 과보, 은혜를 갚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보다는 주로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유교의 효경은 효도를 강조하지만, 부모은중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부모의 10대 은혜
회탐수호은 懷耽守護恩 .. 몸에 실어 보호해주신 은혜
여러 겹 내려오는 인연이 지중하여 금생에 어머님의 태중에 들었어라.달수가 차 갈수록 오장이 생기었고, 일곱달 접어들며 육근을 이루었네. 태 안에 아기 베어 열달이 다가오니 순산이 언제련가 손 꼽아 기다리네. 나날이 기운이 없어 중병 든 사람 같고, 무섭고 두려움을 이루 다 말로 하랴. 눈물만 시름없이 옷 깃을 적신다.
임산수고은 臨産受苦恩 .. 나를 낳으실 때 고통을 마다 않으신 은혜
어지신 어머님이 이 내 몸을 낳으실 때 오장을 육부까지 찢기고 어기는 듯, 정신이 혼미하고 몸 마져 무너지니 끝없이 흐르는 피, 소와 양을 잡았는 듯. 나로하여 겼으신 그 고통 어디에 비길건가.
생자망우은 生子忘憂恩 .. 자식 낳은 뒤 근심,고통 잊으신 은혜
출산하고 아기가 충실하다는 말 들을 때에는 반갑고 기쁜 마음 비길 곳 없었건만, 기쁨이 진정되니 슬픈 마음 다시 나며 아프고 괴로움이 온 몸에 사무치네. 부모의 깊은 은혜 바다에 비유하랴. 귀엽게 사랑하심 한 때인들 어길 것인가.
인고토감은 咽苦吐甘恩 ..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어 먹여 주신 은혜
단 것은 모두 뱉어 아기를 먹이시고 쓴 것만 삼키시면서도 얼굴도 찡그리지 않으시네. 사랑이 깊으시니 참을 길이 없고 은공이 높으시메 슬픔이 몇 곱일세. 어머님의 일편단심 아기의 배 부르고져 사흘을 굶으신들 어찌 마다하랴
면건취습은 面乾就濕恩 ..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주신 은혜
아기는 언제나 마른 곳에 눕히시어 찬바람 쏘일세라 소매로 가리우네.아기를 돌보느라 잠 한번 편안히 주무시랴.둥둥실 둥둥실 끌어 안아 놀리시니 아기만 편하다면 무엇인들 사양하며,어머님 이 내 몸이야 어떤들 어떠하리. 어머니 크신 은혜, 하늘 땅에 견주리까.
유포양육은 乳哺養育恩 .. 젖 먹이고 길러주신 은혜
두 젖을 번갈아서 아이 배 물리시는 어머니 크신 은혜 땅에나 견줄까. 아버님 높은 공덕 하늘에 비기리까. 높고 큰 부모 은덕 천지와 같사오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뜻 다를소냐. 온 종일 사랑하시는 그 정성 아기를 기르시네.
세탁부정은 洗濯不淨恩 .. 언제나 깨끗이 닦아주시는 은혜
은혜가 깊을수록 얼굴은 야위였고 기저귀 빠느라고 손발이 거칠어졌네. 아들 딸 기르느라고 고생은 말로 다하랴.어머니의 꽃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었네.
원행억념은 遠行憶念恩 .. 먼 길 떠나면 돌아오도록 걱정해 주시는 은혜
자식이 집을 떠나 타향에 가게 되면 부모의 슬픈 마음 그 곳을 따라가네. 이 마음은 밤낮으로 자식을 생각하고 흐르는 두 눈물이 천줄기를 만드는구나.자식이 괴로우면 부모 마음 편치 않아 자식이 길을 떠나 먼 곳에 간다 하면 밤이면 추울세라.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잠시인들 쉬오리까.
위조악업은 爲造惡業恩 .. 자식을 위해서는 나쁜 일 마다 않으신 은혜
부모님의 은혜가 강산같이 중하거니. 깊고 깊은 그 은덕은 실로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생하면 부모 마음 편치 않네. 자식들이 잠시 동안 괴로운 일 당할 때면 어머님의 그 마음은 오래 두고 아프셔라. 그리하여 자식을 위하여는 악업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부모님이셔라.
구경연민은 究竟憐憫恩 .. 자식을 위한 은정은 끝이 없으신 은혜
늙으신 부모 나이 백살이 되어서도 여든 된 아들 딸 행여나 걱정하네. 부모의 깊은 은정 언제나 끝이 날까. 이 몸 다한 뒤에도 남아 있으리.
마애여래입상 磨崖如來立像
이 곳 석남사 입구에서 약 1km 떨어진 암벽에 새겨진 불상으로, 전체 높이는 5.3m이다. 불신의 뒤에 광배(光背)와 발 밑의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얼굴 부분이 마모된 것을 제외하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모양의 넓적한 머리묶음이 있고, 둥근 얼굴에는 눈, 코, 입이 비교적 작게 표현되어 있다. 2중으로 표현된 턱과 목 주위에 있는 3줄의 三道 표현은 다소 비대해 보인다.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다.
배 부분에는 U자형 옷주름이, 다리부분에는 타원형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체구에 비해 작은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오른손은 검지만을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머리 주변에는 3줄의 선으로 둥근 머리광배를 나타냈고, 몸통 주위에도 3줄의 몸 광배를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이 보여서 만들어진 연대는 조려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유산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개암사 (開巖寺) .. 백제 부활의 마지막 저항 (0) | 2010.07.17 |
---|---|
[스크랩] 청룡사 (靑龍寺) .. 부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남사당의 고향 (0) | 2010.07.16 |
[스크랩] 안성의 석불(석불)..당간지주 (0) | 2010.07.16 |
[스크랩] 칠장사 (0) | 2010.07.16 |
[스크랩] 문화재 보존과학과 보존처리, 목조공예품 복원 (0) | 2010.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