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개암사 (開巖寺) .. 백제 부활의 마지막 저항

문근영 2010. 7. 17. 09:13

 

개암사 (開巖寺)

 

 

 

 

 

 

 

 

 

 

개암사는 邊山半島의 동쪽에 위치한 千年古刹이다.이 절은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을 이룬 사찰로서, 가람을 찾아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 나무터널을 통과하며 백제를 되새겨 보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평탄한 산책길도, 처음부터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일직선상의 길도 아닌, 한 숨 돌리며 생각할 여유를 마련해 주는 굽은 길이다. 은근히 찾는 이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휜 길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邊山 아래 기품있게 자리잡은 가람의 전경이 펼쳐진다.

 

 

백제 武王 35년(634)에 묘련대사가 창건하였고, 주변의 빼어난 절경과 잘 어우러지는 개암사는 원효대사가 머문 원효방(元曉房)의 本寺로도 이름이 높다. 원효의 자취는 조선 후기까지 수많은 시인,묵객들에 의하여 詩로 읊어졌으며, 부속암자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진표율사가 참선, 득도하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개암사의 매력은 來蘇寺와 마찬가지로 절 입구의 경치와 대웅보전(보물 제292호)의 늠름한 자태에 있다. 그러나 開巖寺의 진입로는 來蘇寺의 일직선상의 전나무숲과는 달리 느티나무, 단풍나무가 자연스럽게 포치된 가운데 넓적한 맷돌이 박혀있는 비탈길이다.

 

 

  

 

 

 

 

 

 

 

 

 

 

 

                                          " 개암(開巖) "의 유래

 

 

 

 

개암(開巖)의 의미를 바위가 둘로 갈라진 형상을 보고...바위를 두개로 열었다(열 開)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 것에 연유하여 개암사(開巖寺)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개암(開巖)에는 역사적인 사실이 엄연하다.

 

 

 

282년 .. 삼한시대에 변한(弁韓)의 文王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의 공격을 피하여 울금바위 아래로 왔다. 이 곳에 王宮을 지었는데, 동쪽을 묘암(卯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 하였다. 외진 변방이지만그 깎아지른 바위 절벽 위에 두 개의 왕궁이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이 외면한 백제의 마지막 首都 역시 이 곳에 있었다.

 

 

 

 

 

 

 

돌길을 걸어 돌축대에 오르면 저 위쪽 돌축대 위로 대웅보전이 울금바위의 준수한 봉우리를 병풍으로 삼아 늘씬하게 날개를 편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울금바위 아래에 개암사가 있고, 개암사 아래에 크고 넓은 계단이 놓여 있다. 

 

 

 

 

 

 

 

 

 

 

 

 

 

 

 

 

 

 

 

 

 

                                            개암사 동종 (銅鐘)

 

 

 

 

 

 

 

 

 1689년(숙종 15)에 제작된 조선 후기의 鐘이다. 총 높이 88cm, 종신고(鐘身高) 74cm, 종구경(鐘口徑) 62cm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이다.

 

 

종신에는 후대에 약간 수리한 흔적과 시주자들의 성명 그리고 鑄造 年代가 확실한 명문(銘文)이 양각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 康熙二十八年己巳四月日開巖寺大鐘重五十斤 "이다. 강희 28년은 조선 숙종(1689년)이며, 개암사의 동종으로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용통의 정상부에는 조선시대의 동종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과 동일하게 만개한 꽃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천판(天板)은 반구형이고, 상대인 견대(肩帶)와 접히는 界線上에는 턱과 같이 돌출된 굵은 선으로 돌리고 있다.

 

 

그 아래로 범자(梵字) 27자로 장식된 견대를 구비하고 있다. 유곽(乳廓)은 견대와 떨어져 있고, 유곽의 문양 역시 꽃문양으로 장식 처리되어 있다. 유곽 안의 9 乳頭 역시 8엽의 화좌(花坐)로서 자방(子房)이 돌출된 형식이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보관(寶冠)을 구비하고 구름무늬 위에 합장한 보살입상 4구(驅)를 장식하여 배치하고 있다. 下帶인 구연대(口緣帶)는 견대와는 달리 연꽃과 작약꽃을 교대로 장식 배치된 문양을 돌리고 있다.   

 

 

 

 

 

 

 

 

 

 

 

 

 

 

 

 

 

 

 

 

 

 

 

 

 

 

 

 

 

 

 

 

 

 

 

  

 

                                                                            울금바위

 

 

 

 

개암사에 갔다면 울금바위에 오를 일이다. 울금바위 500m 아래에 개암사가 있고, 절 아래에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거대한 절벽의 울금바위가 몸을 드러내고, 이윽고 대웅전의 팔작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웅전 뒤 울금바위는 三韓時代부터 역사의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백제 멸망의 마지막 숨소리가 깃들어 있는 ..무너진 백제의 눈물이다.

 

 

 

 

 

                                         白濟의 멸망 그리고 울금바위

 

 

 

660년 7월, 백제는 멸망한다. 알려진대로 한다면 백제의 생명은 거기까지 이었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당시 백제의 인구가 620萬名이었고, 백제의 영토 안에 축조된 城이 200개이었다. 사비성(娑毘城)은 백제의 首都이었을 뿐이다.

 

 

중심이 무너져도, 사비성이 함락되어도 주변은 남는다. 백제는 왕과 귀족들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의자왕(義慈王)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에게 항복한 다음의 백제 역사가 이 곳 개암사 위 울금바위에 녹아있다. 울금바위를 둘러싼 주류성(周留城 .. 물론 위치에 대한 異論은 있다) .. 무너져흩어진 석재와 성벽에는 아직도 패망한 나라의 슬픔이 고여 있는 것이다.

 

 

 

                                               울금바위와 주류성

 

 

그러니까 660년 7월 이후부터 3년동안 周留城은 백제의 또 다른 수도이었다.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부여풍(扶餘豊)도 주류성으로 건너와 백제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풍왕(豊王)에 오른다.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이다.

 

 

 

 

 

 

                                          주류성, 백제의 마지막 저항

 

 

백제의 저항은 결코 연약하지 않았다. 주류성에 거점을 둔 백제부흥군은 갈수록 그 勢가 확장되었다. 662년 신라와 백제부흥군은 주류성에서 멀지 않은 두량이성(두량이성)에서 총력을 다하여 싸운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신라의 무열왕은 아들인 文武王에게 왕권을 넌겨 주고, 백제부흥군은 기세를 몰아 사비성도 공격한다. 그리고 승리가 눈 앞에 있었다.

 

 

 

 

                                                                              신라 문무왕

 

 

 

內紛으로 무너지지 않았다면 끊긴 백제의 숨통은 훨씬 길게 연장되었을 것이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세 사람 .. 복신(福信)돠 도침(道琛) 그리고 부여풍(扶餘豊 .. 豊王)은 서로를 믿지 못하였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왕권에 위협을 느낀 부여풍이다시 복신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 백제의 부흥"을 목적으로 일어났던 군대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663년 음력 8월28일, 슬픈 시간들이 닫힌 역사 안에 갇혔다. 신라는 文武王이 친히 전쟁에 나섰다.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한다, 왜(倭)는 백제를 돕기 위하여 663년 3월 군사 27,000명, 전함 1,000척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였다. 倭의 전함이 상륙한 곳은 백강(白江)이었다. 지금의 동진강 하구이다.

 

 

군대의 세로 보면 오히려 백제와 왜가 더 유리하였다. 왜의 戰艦은 1,000척이었지만, 백강에 포진한 唐나라의 戰船은 170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백강전투에서 풍왕과 왜군장수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전선의 數를 너무 믿고 날씨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倭와 백제의 연합군은 唐나라의 화공(火攻)에 전멸하였다. 결국 주류성도 함락되었다.

 

 

 

 

           백강 .. 신라를 도운 당나라 전함 170척. 백제를 도운 倭船 1,000척이 집결하였다

 

 

 

백제의 숨결은 울금바위 아래로 졌다. 절벽의 바위가 거친 숨을 내 쉴 때마다 개암사는 낮게 운다. 원효대사의 설법으로도 치유되지 못한 것들이 아직 개암사에 남아있다. 

 

 

 

 

 

 

 

 

 

 

                                      백제의 숨결, 울금바위 아래로 지다

 

 

 

모두가 아는 일이다. 백제의 멸망은 한줌의 기록 속에 있다. 역사가 남긴 무수한 문장들은 허상이었으며 겨우 진실 몇줄을 첨가해 놓은 정도이었다. 敗者는 이미 목숨이 끊겼으므로, 입이 있어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660년 여름,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18만 대군을 이끌고 덕물도(德勿島)에 상륙한다. 동시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5만의 병력으로 백제의 동부전선을 넘었다. 모두 18만명의 나당동맹군(羅唐同盟軍) .. 백제가 막아 내기에는 버거운 숫자이었다.

 

 

역사가 기록한 백제의 마지막 전쟁은 허망하였다. 황산벌의 패배는 사비성의 함락으로 이어졌고, 전쟁은 시작되자마자 끝났다. 7일이 걸렸을 뿐이다. 그러나 진짜 전쟁은 3년을 더 지속했다. 그 격전의 땅이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 주류성(周留城)이었다. 1400년의 시간을 넘어 곳곳에 당시의 성벽들이 뚜렷한 실체로 남아있는 것이다.

 

 

 

 

 

                                            원효방    元曉房

 

 

 

 

개암사 뒷산에 있는 울금바위에는 南,北,西 3곳에 石窟이 있다. 북쪽의 석굴은 3곳 중 가장 협소하며 백제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의 옷을 입히기 위하여 베를 짰다해서 베틀굴이라 전해 오고 있으며, 서쪽의 석굴은 몇천명 정도가 수용 가능한 곳으로 3곳 중 가장 큰 석굴로 역시 백제부흥운동 당시

복신(福信)이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은 굴이라고 하여 복신굴(福信窟)이라 불리우고 있다. 

 

 

 

 

 

 

 

 

                                               원효방  元曉房

 

 

 

남쪽의 석굴은 바위절벽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표에서 20여m 정도되는 암벽 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이다, 석굴의 크기는 6~7평 정도되며 이 석굴 옆에 3평 크기의 또 하나의 석굴이 있다.

 

 

이 석굴에서 바라보면 변산의 산들이 첩첩이 발 아래 포개져 들어온다. 3곳의 석굴 중 가장 경관이 뛰어나고 종일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곳인 점 그리고 고려시대의 文臣 이규보(李奎報. 168~1241)

가 남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남긴 글로 보아 이곳이 바로 원효가 修道하였던 원효방(元曉房)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인, 원효는 왜 이 곳에 왔을까?

 

 

 

개암사는 634년 백제 武王시절 묘련대사가 세웠고,삼국이 통일된 후 676년(신라 문무왕)에 원효대사가 중창하였다.

 

 

원효는 울금바위 아래의 작은 석굴(元曉房)에서 수행하면서 때때로 개암사에서 야단법석(野檀法席)을 열었다. 백제의 遺民들은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개암사로 몰려 들었다. 원효는 땅의 통일을 믿지 않았다.원효가 이 곳 周留城을 찾은 이유는 나라를 잃은 백제의 유민들을 다독이기 위하여서 이었다. 원효의 화쟁은 말씀으로 피운 꽃이었다.

 

 

 

고구려,백제, 신라가 하나로(통일신라) 통합되었지만, "진정한 하나는 정서와 생활의 일체 속에서 된다 "고 생각하였다. 신라 사람인 원효대사는 백제의 옛 땅인 이 곳을 왜 찾았을까?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에 그 답이 있다. 원효의 和諍思想은 전체를 겨냥한다. 어느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다. 모두를 융합하여 높은 차원의 하나를 이끌어 냈다.  

 

 

 

 

 

 

 

 

 

 

                                                                  이규보의 南行月日記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유명한 문장가이었던 이규보(李奎報) ..그는 첫벼슬로 그의 나이 32세에 전주목사겸 서기로 이 곳 변산을 찾았다. 그는 邊山의 나무를 베어 개성으로 수송하는 伐木司의 임무를 가지고 변산에 와서 이 곳 울금바위를 찾았고,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그 기록을 남기었다.

 

 

 

 

부령 현재(縣宰)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명과 함께 원효방에 갔다. 나무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척이나 되어 다리를 떨면서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하였다.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려다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포(蛇包)라는 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元曉가 이곳에 와서 살자, 蛇包가 모시게 되었는데 차를 달여 원효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게 생각하던 중, 물이 갑자기 바위틈에서 솟아나았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차를 달아 드렸다고 한다.

 

 

원효방은 겨우 여덟자쯤 되었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톰한 모습이 고고하였다. 방 한 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內室에는 불상과 원효의 진용(眞容 .. 초상화)이 있고, 外室에는 병 하나, 신 한켤레, 찻잔과 경궤(경궤 ..불경 등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나무상자)만 있을 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蘇來寺 .. 지금의 來蘇寺)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 ..불공)에 참예할 뿐이라 한다.

 

 

 

 

 

 

 

 

 

 

 

 

                                    대웅전  大雄殿  ... 보물 제292호

 

 

 

 

 

 

 

 

개암사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건물로서 보물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스님이 사찰을 중창한 이후, 1636년에 계오대사(戒悟大師)가 임진왜란 때 禍를 면한 황금전(黃金殿)을 대웅전이라 개칭하면서, 개암사의 주불전이 되었다

 

 

 

1640년 월파자(月坡子)가 쓴 "법당중창기문"에는 대웅전의 공역을 1636년 봄에 시작하여 1640년 가을에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승담선사(勝潭禪師)가 중수하고, 1960년 해체,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석으로 허튼층 쌓기 한 이중의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거의 다듬지 않은 막돌의 주춧돌 위에 굵은 민흘림기둥으로 장중한 외관을 지니고 있으며,추녀의 귀솟음이 무착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건물 외부에는 3.4분합의 빗꽃살문과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대웅보전 편액이 걸려 있으며, 현판의 처마 밑에는 두 개의 용두(龍頭)가 건물을 外護하고 있다. 평방 위에는 다포형식의 내외삼출목 포작을 얹어 대량과 충량을 받도록 하고, 협칸에 2개, 어칸에 3개씩 10개의 공간포를 형성하였다.

 

 

 

 

 

 

 

 

 

 

 

 

 

 

 

                                                                       대웅전,  닫집

 

 

 

 

닫집은 법당 안에 되살린 불국정토의 궁전이다. 법당은 단순히 불상,보살과 신중(神衆 ..神의 무리)

들을 모셔놓고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만든 機能的 空間이 아니라 부처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묘사해 놓은 상징적 공간이다.

 

 

대웅전은 부처의 영산회상을 상징한 집이고, 극락전은 아미타여래의 서방극락정토를, 약사전은 약사여래의 동방정유리세계를,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미륵전은 미륵불의 도솔정토를 구현한 공간이다. 법당에 들어가는 행위가 부처의 주처인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의미를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는 여러가지 장엄구(莊嚴具) 중에는 부처의 몸을 장식하는 신장엄구(身莊嚴具)가 있고, 건축물 등 부처의 몸 이외의 것을 장엄하는 부속 장엄구가 있다. 신장엄구(身莊嚴具)로는 보관(寶冠), 흉식, 영락, 광배 등이 있고, 부속 장엄구로는 수미단(須彌壇), 대좌, 후불탱화,닫집 등이 있다.

 

 

닫집은 그 모습이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과 같아 그렇게 불린다. 수백 수천의 나무조각을 정교히 다듬고 깎아 짜맞춘 극히 섬세하고 화려한 닫집은 궁전의 전각을 연상케 하는 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닫집은 두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보개(寶蓋 또는 天蓋)로서의 상징이다. 寶蓋는 부처의 머리 위에 설치한 일종의 장엄구로써 그 원형은 일산(日傘)에서 찾아지고, 그 원류는 고대 인도에 있다.

 

日傘은 열대지방에서 귀인이 외출할 때에 강한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석가모니가 옥외에서 설법할 때에 일산을 쓴 것에 연유하여, 불상에도 보개를 머리 위에 장식하는 풍습이 생겼다. 당초에 일산은 이처럼 생활용품일 뿐이었으나, 후에 聖人 신분으로 서의 위계와 권위,종엄 등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닫집이 부처의 머리 위 높은 곳에 있으면서 부처의 지위와 권능을 높이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닫집을 법당 안에 설치한 원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佛國淨土의 궁전 모습을 법당 안에 재현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개암 죽염   開巖 竹鹽

 

 

 

 

 

이 곳 개암사의 죽염은 1,400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 1,400여년 전 진표율사(眞票律師)가 개암사를 찾아와 변산 울금바위의 굴(窟)에서 백일기도를 하는데, 이 때 개암사의 스님들에게 죽염의 비법을 전해 지금그까지 대대로 그 비법을 전수받아 전해 오고 있다.

 

 

진표율사는 이 곳 개암사의 부속 암자인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竹鹽의 제조방법을 개발, 전수한 이래 주로 佛家의 스님들 사이에서 민간요법으로 전래되어 온 건강 소금이다.그러다가 1988년 개암사의 방장스님이 제조 비법을 전수받아 공장을 준공하면서 민간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그 효능이 알려지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게 되었다.

 

 

 

 

 

 

 

특히 개암죽염은 청정해역인 변산반도의 곰소염전에서 생산된 미네랄이 풍부한 天日鹽을 3년 이상 자란 대나무 통 속에 넣고 황토 경단으로 마게를 한 뒤 소나무 장작만을 연료로 사용하여, 고온으로 구워내기를 8번 반복하고, 마지막 9번째에는 소나무에 송진을 뿌려 가열 온도를 더욱 올리게 되면 소금이 녹아 흘러 내리게 되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른바 "잿빛보물소금"이 탄생한다.

 

 

 

죽염 효능의 요체는 바로 대나무의 유효성분과 천일염의 미네랄의 결합에 있는 것인 만큼 좋은 원료를 사용함과 동시에 죽염을 굽는 기술에 따라 품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이 곳 변산지역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영산회괘불탱  靈山會掛佛撑  ... 보물 제1269호 

 

 

 

 

 

 

 

석가불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좌우에는 문수,보현보살을, 뒷쪽에는 다보여래,아미타여래,관음보살, 세지보살을 배치하여 釋伽 7尊圖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본존불의 머리 좌우에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 수인(手印)의 화불을 모시고 있어 결국 9존도 형식의 석가불화를 나타내고 있다. 크기는 길이 14m, 폭 9m의 대형 불화이다.

 

 

화면을 가득하게 채운 구도와 경직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 전형적인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秀作이라 하겠으며, 당대의 가장 뛰어난 佛畵僧인 의겸(義謙) 등이 참여하여 제작한대작이라는 점과 화기에 의하여 제작시기(조선 英祖 25. 1749년)가 밝혀져 있어, 우리나라 불교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산회도 밑그림 (草本)

 

 

 

 

 

 

초본은 위 괘불탱의 밑그림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유일한 사례이다. 빠른 서능로 활달하게 그려내고 있어 당대의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본존불 좌,우쪽의 네모꼴 빈 공간은 화불형태의 노사나불과 비로사나불을 배치했던 바리로 아마 별도의 바탕에 그려 삽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본은 당시 괘불탱화의 제작 과정과 필치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