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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 채마밭 가에서 시 짓던 날들 / 이지양

문근영 2010. 5. 23. 09:53

채마밭 가에서 시 짓던 날들


이지양(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선생이 쓴 『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의 서문을 읽다가 웃었다. 그것도 내면에서 행복한 느낌이 솟구쳐, 저절로 웃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었을 때처럼, 혹은 이태백의 ‘소이부답 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이라는 시구를 읽었을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웃음이 고였다.

선생이 이 서문을 쓴 것은 을사년(乙巳年: 1785, 38세) 8월이지만, 글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778년을 추억하며 시작된다.


회상해보니 무술년(戊戌年: 1778년, 31세) 무렵 종강(鍾岡: 지금 명동성당 부근)에 우거(寓居)하면서 낡은 집 세 칸에 붓과 벼루, 칼과 자가 뒤섞여 있었는데, 이런 것이 싫증나서 자그만 채마밭에 자주 앉아 있게 되었다. 콩 넝쿨과 무꽃 위에 벌과 나비가 한가로이 날아드니, 비록 밥 짓는 연기가 여러 번 끊겼지만 의기(意氣) 소침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때때로 우리나라의 지지(地誌)를 열람하면서 한 수의 시를 얻으면 곧 여러 날을 고심하며 읊조리게 되니 어린 아들과 계집아이 종이 모두 이것을 듣고 외울 정도였다. 내 마음 씀이 얕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30대 가장이 떠오른다. 온갖 살림살이와 서책, 필기도구가 뒤섞여 어지러운데 정리하려고 해도 정리되지도 않는 답답하고 비좁은 방이 환하게 그려지고, 한 뼘이라도 빤하게 트인 공간을 갈구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선생은 그럴 때면 집 주변의 자그마한 채마밭에 나가서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무꽃에 벌이며 나비가 날아드는 것을 구경하다가 신선한 기분을 되찾고, 평화로운 기분을 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쌀이 떨어져 밥 짓는 연기가 여러 번 끊기었는데도 마음이 우울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태연하게 역사를 회고하며 시를 짓고 있는 선비, 그리고 그 곁에 앉아 어린 아들과 어린 여종이 배고픔을 잊은 채 귀담아 듣고서 그 시를 외우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유득공 선생은 나중에도 이 가난한 시절을 잊을 수 없었고, 행복하게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선생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기해년(己亥年: 1779) 이후 규장각(奎章閣)에 봉직하면서 임금의 은혜를 입어, 7년 동안 일곱 번 벼슬을 승진하게 되었다. 녹봉은 입고 먹는 것을 마련하기에 족하고, 집은 붓과 벼루를 벌여 놓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직무에 바쁘다보니 시 짓기를 즐기지 않았고, 시를 짓게 되더라도 모두 쉽게 거칠게 이루어져 이전의 고심하며 읊조리던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채마밭 가에 나가 앉아 시를 짓던 그 다음해부터 7년 동안 일곱 번 벼슬을 승진하여, 생활이 안정되고 집도 넓어졌다. 그런데 선생 자신의 행복감이랄까 만족감은 도리어 줄어든 것 같다. 시를 짓게 되지도 않고, 어쩌다 짓더라도 정성들여 짓지 못하여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몇 푼 월급을 받으면, 자기 스스로 내면의 꽃대를 올려 한 송이 오롯한 꽃을 피울 겨를이 없어지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고민거리인 것일까?

   

어쨌든 이 글은 내게 유득공 선생의 인품과 학문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평소에 유득공 선생의 인간상이 잘 그려지지 않고, 정감이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친근감이 생겨났다. 그것이야말로 선생의 ‘차원 높은 내공’에서 우러나온 흡인력이리라. 따뜻함과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문학, 그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업적이 아닐까. 그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이 글 한편에서 얻었던 평화와 안식, 그리고 행복한 웃음을 나누고 싶다.

 


글쓴이 / 이지양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 논문:「연암 박지원의 생활 특징과 문화예술사상」(『한국한문학연구』36집, 2005)외 다수

· 저서 : 『홀로 앉아 금을 타고』, 샘터사, 2007

· 번역서(공역): 『역주 매천야록(상.하)』, 문학과지성사, 2005

                    『역주 이옥전집』, 소명출판, 2001

                     『조선후기 문집의 음악사료』,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0

                    『조희룡전집』, 한길아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