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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이야기] 붕당싸움이후의 거짓기록 / 박석무

문근영 2010. 5. 14. 16:38

붕당싸움 이후의 거짓 기록


세상에 무서운 것은 당파싸움입니다. 조선 5백년 동안 끊이지 않고 벌어졌던 당파싸움은 끝내 나라를 망하게 했던 요인 중의 하나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당쟁의 한복판에 있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지난해가 탄생 400주년으로 많은 기념행사도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집권세력인 노론계열에서는 이른바 공(孔)ㆍ주(朱)ㆍ송(宋)이라 일컬어지면서 학문과 권위에 있어서 절대적인 지위에 있었던 분이 바로 송시열이었습니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 유교를 성리학으로 체계화하여 동양중세의 대표적 학자로 후공자(後孔子)의 칭호를 듣던 주자, 송자(宋子)라고 하면서 공자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조선 최고의 학자라고 권위와 명예를 한 몸에 안겨 준 학자가 다름 아닌 송시열이었습니다. 중국의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맞수가 되도록 200권이 넘는 송시열의 문집도 임금의 지시에 따라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는 최상의 호칭을 받는 이름으로 간행되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그만한 학문적 명성과 권력의 권위를 지녔기에 자기와 반대당이던 백호 윤휴라는 송시열과 버금가던 남인의 학자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참담한 비극 중에서도 최대의 비극인 사건입니다. 효종대왕이 세상을 떠난 뒤, 복제(服制)문제로 노론과 남인의 견해가 나뉘어 극심한 대립을 하던 때인데, 송시열은 윤휴를 죽이면서 주자학을 반대하여 사서(四書)의 주(註)를 개정한 이유로 처형했지, 예송(禮訟) 즉 효종의 복제 때문이 아닌 것으로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마치 해방 후 정적을 죽이면서, 정적이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용공이거나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죽인다고 했던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산은 남인 계열의 학자였습니다. 대체로 당파를 들먹이거나 당쟁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한 삼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산은 『우암연보』, 즉 송시열의 일대기를 살펴보고는 “붕당으로 갈려진 이래로 기록의 대부분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도 보입니다”(朋分以來 文字之多不可盡信 有如是矣 : 與李汝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송시열과 윤휴와의 일을 연대로 따져 『우암연보』의 오기를 발견하여 역사적 사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의 횡포는 언제나 역사적 사실도 변조하는 경우가 이렇게 명확하다는 것을 다산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역사의 많은 기록은 이런 변조가 많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쟁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