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 ‘미국의 우산’ 아래서 보낸 64 년』 / 김종철

문근영 2010. 3. 13. 07:45

 

 

[오바마시대와 한국19]


7.1. ‘미국의 우산’ 아래서 보낸 64 년

미국은 한국이 함께 가야 하는 나라이다. 무엇보다도 2만 명이 넘는 그 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중국 다음 가는 한국 상품 수입국이다. 그리고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개인의 세계관,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평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은 대체로 ‘미국은 북한의 침략을 막아주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주는 최대의 동맹’인 동시에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앞서가는 시장경제를 배워야 하는 선진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통째로 그른 것은 아니겠지만, 이 글에서 시종일관 강조했듯이 미국을 그렇게만 본다면 한국사회의 발전은 물론이고 개인의 창조적 사고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하면 무엇이든 최고!’

 

내 또래의 사람들은 ‘미국 하면 무엇이나 최고’라고 여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6월 25일에서 며칠이 지난 무더운 여름날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을 넓은 터에 모인 동네 어른들이 “괴뢰군이 남침을 해서 서울을 점령한 뒤 남으로 밀고 내려온다”면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피란 떠날 걱정을 하던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굉음이 울리더니, ‘무스탕 비행기’라고 부르던 거무튀튀한 물체가 날아가면서 하얀 ‘삐라’를 쏟아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엔군이 곧 참전해서 ‘괴뢰군’을 무찌르겠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로는 질이 좋은 종이에 인쇄한 그 삐라들은 산에 들에 널려 있어서 아이들은 그것을 주워서 딱지치기를 하거나 종이비행기를 날리곤 했다.

 

경부선 열차가 잠깐 머무는 충청남도의 소읍인 나의 고향으로 북한군이 하루 이틀이면 들이닥치리라던 날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피란길에 올랐다. 누이동생을 등에 업은 어머니를 따라 만 여섯 살 배기가 수십리 길을 걸어가면서 몇 발자국도 못 가서 쉬면서 짜증을 부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 형제들은 부산으로 간다면서 남쪽으로 떠난 뒤 소식이 없고, 심심산골의 친척 집에서 보내는 피란살이는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퉁퉁 불어터진 보리밥 한 덩이로 아침과 저녁 끼니를 때우고 점심은 굶는 것이 예사였다. 코흘리개들은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설익은 땡감을 따서 먹거나 송화가루로 배를 채웠다가 항문이 막혀 눈이 뒤집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두어 달 남짓이 지나서 국군이 북진을 시작하고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9월 28일 인천에 상륙한 뒤 한참만에 ‘마침내’ 우리 마을에 미국사람들이 찾아왔다. 마을을 지나는 경부국도의 다리가 폭격을 당해 허물어진 것을 복구하러 온 공병부대였던 것 같다. 그들은 생김새가 참으로 신기했다. 얼굴이 우유처럼 하얗고 눈은 퍼렇고 코는 우뚝 솟은 백인들 사이에 석탄처럼 새까맣고 아이들 눈에는 다른 별에서 온 듯이 보이는 흑인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리 언저리에서 진을 치고 살았다. 미군들이 작업을 하다가 휴식시간이 되면 요즘말로 ‘이벤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 사람이 높다란 트럭에 올라가서 초콜릿과 과자를 땅으로 뿌리면 아이들은 결사적으로 몸을 던져 그것들을 덮쳤다. 운 좋게 그 별난 먹을거리를 손에 넣은 아이들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다른 어린이들이 빼앗기라도 할까봐 흙가루가 묻은 채로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잽싸게 입에 넣었다. 미군 병사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했다.

 

‘고마운 미국’의 가루우유

 

이듬해에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간 우리에게 ‘고마운 미국’이 손을 내밀었다. 미군 전투기들이 무차별 폭격을 해서 기둥만 앙상하게 남은 ‘교실’에서 차디찬 마루바닥에 앉아 몽당연필 심에 침을 묻혀가면서 공부를 하던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면 먹을 것이 없어서 양지에 모여 해바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비참한 곳에 어느 날부터 미국의 원조물자인 ‘가루우유’가 배급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성조기와 한국의 태극기가 악수하는 그림이 선명하게 찍힌 그 우유 자루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에게도 최대의 ‘영양 공급원’이었다. 사람들은 허기지면 허겁지겁 그 우유를 가루 채 먹고, 좀 느긋해지면 쪄서 먹기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들은 것이지만 그 우유가 ‘사료용’ 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양식‘이었다.

 

미국 하면 착하고 잘 사는 사람들의 나라라고만 여기고 있던 아이들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가루우유가 선을 보인 시기와 엇비슷했다. 동네 어른들은 미군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에 처녀들이나 부녀자들이 혼자 다니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런 일보다 더 희한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우리 동네의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 집 딸 양갈보로 갔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집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던 아이들도 그런 집 딸들이 화사하게 치장을 하고 ‘미제’ 옷이며 신발이며 치약, 그리고 아이들이 그렇게도 먹고 싶어 하던 ‘씨레이션’(미군의 야전 식품)을 한 보따리 싸들고 귀향하면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것이 지금도 미군부대 주변에서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슬픈 역사’의 시작이다. 그 이래 6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한국 여자들이 가난을 벗어나려고 미군을 상대로 인신을 매매했으며, 더러는 사랑이 싹터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갔지만 문화와 생활관습의 충돌 때문에 버림을 받거나 이혼을 했을까? 나는 1990년대 초에 미국 북동부의 시애틀에서 가까운 타코마(유명한 보잉비행기회사와 큰 공군기지가 있는 곳)에 그런 여성들이 2만여 명이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남편과 헤어져서 어렵게 산다는 것이었다. 미식축구팀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슈퍼볼’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하인즈 워드는 미군 출신과 이혼한 한국 여성이 눈물겨운 노력으로 일궈낸 보기 드문 성공사례일 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 앰 어 보이’로 시작해서 ‘ABC 노래’를 지나 더듬더듬 ‘미국말’을 배워나가던 때 영어 단어 하나라도 남보다 빨리 외우려고 얼마나 기를 썼던가? 요즈음은 유아부터 어른까지를 ‘소비자’로 삼는 거대한 영어 사교육시장이 불황에도 고래처럼 돈을 빨아들이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미국을 고마워하고 동경하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의 4월혁명 때였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어린 시절에 그렇게도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아주 나쁜 독재자임을 중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닫고서는 증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와 담이 붙어 있는 곳이었다. 4월 19일 아침 9시 반께, 물리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야, 어제 고려대 학생들이 깡패들한테 쇠뭉치로 얻어맞았는데 너희들 어떻게 생각하니?”라면서 은근히 분노를 자극하고 있던 참에 대학로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교생이 순식간에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누군가가 무명커튼을 찢어서 만든 천자락에 ‘민주주의 사수하자’라는 먹글씨를 써 들고 앞장을 서자 모두 교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서울대 문리대와 의과대 앞을 지나서 종로5가 네거리로 가니 건물 창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격려의 손뼉을 치고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우리 고등학생들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 댔다.

 

조금씩 이상해진 미국

 

우리는 정신없이 서울시청 광장을 지나서 중앙청(지금의 경복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경무대(현재 청와대) 앞 2백여 미터 지점까지 갔다. 앞에는 동국대 학생 수백 명이 도로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경무대 입구에는 배관용 시멘트통을 쌓아놓고 경찰관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납작 엎드린 채 겁에 질려서 앞을 보고 있었다. 오후 1시쯤이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뛰어’ 하는 선생님의 고함에 따라 우리는 삼일당(진명여고 강당) 옆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그 고등학교 학생 열두어 명이 총을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다.

 

4월 26일은 참으로 기쁜 날이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면서 이승만이 물러났기 때문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주한 미국대사인 월터 매카니기를 통해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이 빨리도 퍼졌다. ‘아니 그동안 독재자를 그렇게도 감싸던 미국이 웬 일이지?’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해관계가 걸린 나라들에서 미국이 독재자를 비호하다가도 세 불리해지면 가차없이 버린다는 것을 그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 이상한 일은 1961년 5월 16일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육군소장 박정희의 주동으로 김종필을 비롯한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건너 와서 4월혁명의 결과로 세워진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는 쿠데타를 저질렀는데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가 아리송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4월혁명 뒤에 급진적인 대학생들은 남북통일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쳤는가 하면, 기성세대 중에서도 혁신세력이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자 보수적인 정당들과 언론이 ‘안보 위기’를 요란하게 강조했다. 게다가 ‘무능한 장면 정부’라는 비판이 옛날의 동지인 민주당 구파에서 거의 날마다 쏟아져 나왔다.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들어선 장면 정부 역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 ‘새롭고 적극적인 교섭’을 시도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에 의해 중단되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으며 그의 쿠데타 동지들 가운데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는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 회담을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21일, ‘미국의 오만· 일본의 무례에 앞서 한국의 비굴함 을 먼저 반성해야’, 이재봉 기자의 기사에서)

  *이재봉 기자는 한국 정부가 40여년만에 공개한 ‘한일 회담 문서’와 미국의 한국 관련 외교 문서들을 검색한 결과를 바탕으로 위의 기사를 썼다고 밝혔다.

 

위에 인용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의심하면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다가 며칠 뒤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약 그때 케네디가 박정희 군대가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 없이 이동한 것을 문제 삼았다면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을 것이다. 이래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기까지 18년 5개월의 기나긴 독재가 시작된다.

 

‘광주’를 버리고 전두환을 택하다

 

1980년 5월에 미국은 또 ‘이상한 일’을 저지른다. 박정희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서울의 봄’을 군화발로 억누르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과 청년들을 체포하자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이 18일 오전에 항의시위를 벌인다. 그것이 시민항쟁으로 커지고 전두환 일파가 광주를 무장 공격하기 시작한다. 공포 속에서도 평화롭게 며칠을 보내던 시민들은 ‘미국이 곧 항공모함을 보내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국은 끝내 광주를 저버리고 전두환을 택했다. ‘인권대통령’을 자임하던 지미 카터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퇴임 뒤에 그가 세계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은 별개 문제이다. 카터의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이 198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전두환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가까운 친구처럼 등을 두드렸다는 사실은 이 글의 앞부분에 쓴 바 있다.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이고 ‘문민정부’의 김영삼, ‘국민의정부’의 김대중, ‘참여정부’의 노무현도 미국의 위세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미국의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지배세력과 주한미군에 당당히 맞서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용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사사건건 대립했다가는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우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도처에서 미국이 비호하던 독재자나 통치자들이 등을 돌릴 때 어떻게 ‘처리’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한미군이 터무니없이 주둔비를 요구해도, 환경을 오염시켜도, 한국인들에게 잔인한 범죄행위를 해도,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요청해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미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악화되는 것도 큰 부담이지만 미국 때문에 느끼는 해묵은 심리적 불안 상태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오바마의 ‘인맥’을 찾아라?

 

2008년 11월 6일 오전 2시(한국시각) 버락 오바마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우리나라에서, 특히 정부와 재계에서 ‘오바마 인맥을 찾아라’가 지상과제처럼 떠올랐다. 미국의 우산 아래서 60 년 가까이나 권력과 부를 누려온 보수세력에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오바마 당선자와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미국시민권을 가진 우리나라 동포로서 오바마의 승리에 기여한 사람은 누구인지, 미국 정·재계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보좌할 ‘친한인사’는 누구인지를 알아내서 빨리 선을 대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인맥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끈이나 핏줄 같은 것일까? 사랑이나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일까? 아니면 이익을 좇아서 함께 움직이는 개인들의 유대일까? 이 모두가 정도 차이는 있어도 인맥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오바마를 찍은 미국인들의 투표용지(실제로는 전자투표지만)에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리도 조급하게 인맥 찾기에 나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조건반사’라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에 취임한 직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라는 선물을 부시 2세 대통령에게 주고 곧바로 워싱턴에 가서 백년지기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였는데, 부시와는 전혀 다른 성장배경과 정치철학을 가진 오바마의 인맥을 어떻게 빨리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가만히 있는데, 참모들이 그랬을까? 대통령 취임 한 해가 지난 2009년 초봄까지 이명박 진영에서 오바마 인맥을 얼마나 찾아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세로는 오바마 대통령이나 미국 행정부 또는 재계의 중요 인물들과 단시일에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오바마가 매케인을 누르리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선거 두어달 전부터 미국의 여러 언론매체에 나오던 무렵에, 막판까지 ‘부시와의 우정’을 강조하던 이명박 진영은 다급해진 것 같다. 그 조급증이 오바마의 당선 확정 직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 신문 방송 등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인맥’을 강조하면서 혹시나 나라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오바마의 옛 친구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외교 실무라인은 아예 묵묵부답이고 그나마 국제적 인맥이 있다는 국회의원 몇 명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여하여 오바마 후보자와 악수하며 찍은 사진 한 장이 한국과 미국 대통령 당선자 사이에 형성된 스킨십의 전부이다.

  하지만 내년 초 미 대통령 취임식까지 국내 인맥을 뒤져봐야 나올 리가 만무하다. 오바마가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 남짓밖에 안 되는 신인이고 워싱턴의 중앙무대보다는 시카고 외곽에서 빈민운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워 백악관을 접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류 인사들만 접촉을 시도했던 한국 정부나 정치권이 유색인종이자 비주류 정치인인 오바마에게 그 동안 관심이나 두었을지 의문이다. 투자가 없으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일보> 2008년 11월 13일자,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의 칼럼, ‘오바마의 인맥 찾기’에서)

 

오바마 인맥 찾기에 몰두하기는 야당인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아무개가 그와 선이 닿는다느니, 어떤 한국 교민이 오바마 선거 캠프에서 중요한 일을 했다느니 하면서 나라 안팎 뒤지기에 나섰던 것이다. 한국에서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공천을 받으려고 인맥을 찾아서 효과를 본 것처럼 오바마 대통령에게 접근하겠다는 뜻이었을까?

 

해답은 먼 데 있지 않다. 정부와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인맥을 통해 오바마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말고, 미국 대통령을 전보다 훨씬 더 자주적인 자세로 대하면서 정책과 이념 양면에서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가장 좋은 인맥을 일구어 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7.2. 오바마의 ‘정직한 정부’와 한국


오바마는 대통령에 취임한 바로 그 날 ‘정직한 정부’ 만들기에 시동을 걸었다. 새 정부의 윤리와 투명성을 규정하는 두 건의 행정명령과 세 건의 대통령 각서에 서명한 것이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공직자들과 로비스트들의 접촉을 엄격히 제한하고, 백악관에 근무하는 고액 연봉자들의 봉급을 동결하며, 정보자유법을 바탕으로 정부기록물 등의 공개를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부에서 일하는 어떤 공직자도 로비스트의 선물을 받을 수 없도록 하겠다”면서 “오늘 이 시간부터 로비스트들은 역사상 어느 정부보다 더 엄격한 제한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서 1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 백악관 참모들의 연봉도 동결했다. 그는 또 “행정명령들 자체만으로 정직하고 투명한 정부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워싱턴의 책임감과 재정 규제를 복원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나라의 ‘개방의 새 시대’를 시작하는 역사적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기 오래 전부터 ‘정직한 정부’에 관한 구상을 밝혀왔다. 그는 연방 상원의원 시절이던 2006년 8월 28일 아버지의 조국인 케냐의 나이로비대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 사람들이 정부가 그 존재이유인 직무-국민을 보호하고 공동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일-를 잘 수행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밖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반부패 투쟁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투쟁들 중 하나인 까닭입니다.

(·····)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개혁이 쉬우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한 나라가 진정으로 개혁을 시작할 몇 개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바마가 ‘정직한 정부’를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전임 대통령들의 재임 기간에 부정과 부패에 관련된 대형 사건들이 일어나서 행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졌기 때문인 것 같다.

 

클린턴이 남겨준 교훈

 

그 누구보다도 오바마의 민주당 ‘대통령 선배’인 빌 클린턴이 첫 임기 때 ‘화이트워터’ 스캔들에 휘말려 재선에 실패할 뻔했던 일이 오바마에게 경각심을 안겼을 것이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인 1978년에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짐 맥두걸과 함께 지역을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택지를 사들인 뒤 79년에 ‘화이트워터’라는 부동산회사를 공동명의로 차린다. 맥두걸은 1985년 주지사선거 때 클린턴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89년에 자신이 경영하던 신용금고회사가 파산하자 클린턴이 직권을 남용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1992년 대선 당시 <뉴욕타임스>가 이 문제를 보도한 이래 클린턴 대통령은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는 등 갖은 곡절을 겪은 끝에 무죄와 유죄 사이를 오가다가 가까스로 벗어나서 재선에 성공한다. 힐러리도 화이트워터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오바마의 직전 대통령인 부시 2세 재임기간에는 행정부와 경제계에서 크고 작은 부정사건들이 터진다. 그의 임기 첫 해인 2001년 말, 텍사스주 휴스턴에 본사를 둔 엔론회사(2000년도 매출 1,110억 달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기, 천연가스, 펄프·제지, 통신사업체)가 법제도의 허점을 악용하고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서 대규모 부정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서 경영책임자가 재판을 받고 24년 형을 선고받는다. 엔론은 경제전문지 <포천>이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한 데다, 회계부정의 피해가 너무 커서 지금까지도 대기업의 사기와 부패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런데 정작 미국과 여러 나라의 관심을 더욱 끈 것은 엔론이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과 심상치 않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2001년 1월 20일, 부시는 대통령 취임식에 엔론의 당시 회장인 케네스 레이와 사장인 제프리 스킬링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취임식 행사에 각자가 10만 달러씩을 기부했다. 그해 2월 22일에는 레이와 엔론의 다른 임원들이 백악관에 가서 체니 부통령의 ‘에너지 태스크포스’와 회동한다. 그 뒤에도 엔론의 임원들이 딕 체니를 여러 번 만난다. 부시 1세와 엔론의 경영책임자가 같은 텍사스주에 사업 기반을 두고 있는 데다 취임식에서 거액의 ‘헌금’이 오고 갔으니 대통령이 의혹의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체니도 국가의 극비사항인 에너지 관련 정보들을 엔론에 넘긴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으나 역시 사법처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기업과 밀착한 부시와 체니

 

부시와 체니 두 사람 모두 갑부 소리를 들었다.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부자는 자랑스러울 수 있겠으나, 최고권력자가 된 뒤에 부정과 관련된 의혹을 받는다는 것은 정부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일이다. 부시 2세 임기의 최대 회계부정 스캔들이었던 엔론 사건은 오바마가 ‘정직한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딕 체니(Dick Cheney, 1941~ )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정치인이다. 그는 1978년 와이오밍주에서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뒤에 다섯 번이나 연임한다. 그는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낸 뒤 조지 부시 1세 대통령의 국방장관으로 일한다. 그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에너지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던 핼리버튼의 회장으로 근무하는데, 1998년에 드레서라는 회사와 합병할 때 회계가 불투명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체니는 조지 부시 2세가 2000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부통령으로서 미국 정계와 경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체니는 9·11 사태 이후 부시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 을 ‘설계’한다. 그가 에너지 태스크포스를 이끄는 공직자로서 엔론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데 관해 정부기록을 공개하라는 여론의 요구에 불응하자 시사주간지 <타임>과 CBS로부터 ‘정부의 제4부’라는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중앙정보국의 기밀을 누설하는 등, 가뜩이나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던 부시 2세 대통령의 ‘길동무’로서 부통령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다.>

 

오바마가 부닥친 장애물

 

‘정직한 정부’라는 깃발을 치켜든 오바마 앞에 장애물들이 나타난다. 오바마 당선자가 상무장관으로 지명한 빌 리차드슨 뉴멕시코 주지사가 2009년 1월 4일 주정부와 거래가 있는 기업이 사법당국의 수사대상이 된 것을 이유로 사퇴한다. 클린턴 행정부 이래 ‘북한통’으로 알려진 그의 낙마는 아쉬운 일이지만 오바마는 사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취임 뒤인 2월 3일에는 백악관 ‘성과 담당 최고책임자’로 지명되었던 낸시 킬퍼가 1995년에 ‘겨우’ 298 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보건장관으로 지명된 톰 대슐도 탈세 의혹을 받고 킬퍼와 같은 날 입각을 포기한다. 그리고 티머시 가이트너는 세금 불성실 신고가 불거져서 인준과정에서 시달리다가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수장인 재무장관에 가까스로 취임한다.

 

여기까지 보면 오바마의 취임 전후 한 달은 크게 얼룩진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의 이명박 정부와 비교하면 가히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위장전입, 탈세처럼 증거가 드러난 사건들이나 부동산 투기와 ‘BBK 불법 경영’ 같은 의혹의 산을 넘고 넘어 박근혜 후보를 간신히 물리치고 본선에 나가서, 거기서도 더 높은 산을 넘은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덕성을 크게 의심받는 일들이 인수위 때부터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국무위원 내정자가 된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 탈세, 위장 전입, 건강보험료 안 내기, 논문 표절 등으로 임명장을 못 받고 물러났다. 대통령 취임 한 해가 되는 2009년 2월 25일까지 국회에서 이렇다 할 흠 없이 인사청문회를 치른 사람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부도덕은 국민의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치고, 심각한 문제는 정작 대통령이 그렇게 흠집 투성이인 인물 중 대다수를 장관이나 행정부의 고위직에 기어코 임명한다는 사실이다. 불법이나 부정이 드러난 사람을 단호하게 배제하지 않고 ‘직무 능력을 높이 산다’는 것을 명분 삼아서 말이다. 국민의 신뢰를 받기에는 너무나 일방적인 처사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글쓴이 / 김종철
· 전 동아일보사 기자
·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2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