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된 詩

둘레 / 안도현

문근영 2010. 2. 11. 06:16


둘레 / 안도현
이 술잔에 둘레가 없었다면……
나는 입술을 갖다대고 술을 마실 수 없었겠지
그래, 입술에 둘레가 없었다면……
나는 너를 사랑할 수도 없었을 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술 마실 일도 없겠고,
술잔 속에 보름달이 뜨지도 않겠지
저 보름달에 둘레가 없었다면……
아무도 찐빵을 만들어 먹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 찐빵에 둘레가 없었다면……
그 뜨거운 찜통 속에서 부풀어오르다가
멈추어야 할 때를 잊어버렸을 걸
그렇다면……
보름달이란 무엇인가
찐빵이 하늘로 솟아올라 둘레를 갖게 된 것인가

술잔, 찻잔 수많은 잔을 입술로 가져가봤지만 둘레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시인들은 참 엉뚱하다. 
술잔에 담긴 술만 마시면 됐지 왜 둘레를 들여다보는가. 혹시 술잔을 들면서 입술을 생각한 건 아닌가. 
술과 입술의 유비(類比). 술-입술-사랑에서 술잔-보름달-찐빵으로 건너뛰는 상상력의 움직임. 그러나 정작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은 
둘레의 의미에 있는 게 아닌가. 모든 사물은 가두리가 있어야 제 형상을 지닐 수 있다는 것. 사물만 어디 그러하랴.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파멸떨어지지 않게 되느니―. 그런데 혹시 아세요?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입술 가진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장옥관(시인)대구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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