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공백이 뚜렷하다/문인수

문근영 2010. 1. 29. 10:47

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 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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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뿔』『홰치는 산』『동강의 높은 새』『쉬!』.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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