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붓 / 고미숙
그는 바람시에 태어난 붓이다
버석거리는 침묵을 봇짐 가득 지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이다
가늘게 뜬 눈 속 펼쳐진 세상에서
구름이라도 읽어내는 향기 만나면
스스럼없이 몇 날이고 봇짐 풀고 앉아
콧잔등 시린 매화를 토해 놓는다
얼음 속 잠든 연꽃을 깨워 올리고
달빛 머금은 창호지문에 황국을 피운다
먹그림의 숨소리가 백리 밖까지 흘러
누군가의 팔목을 잡아 이끌어 오는 날엔
낯선 여인의 옷섶에서 홍매화가 터진다
돌담 너머 매화가지 뻗듯 수런거리는 날엔
색을 머금은 붓이 흐르는 물에 입을 씻고
봇짐 속으로 들어가 긴 동안거에 든다
바람시에 태어난 턱수염 많은 그가
바람의 신발을 고쳐 신을 때도 이때다
어떤 꽃도 제 가슴 풀어 놓을 순 있어도
바람의 발목 동여매진 못한다.
-[우리시] 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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