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등대의 추억
백도 관광을 마치고 거문도항으로 되돌아 시간이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아침나절 고기잡이배들이 내는 싱싱한 갈치 경매로 북적이던 수산시장은 파장이 되었는지 한산했다. 예전 파시 때면 배들이 몰려들어 경매꾼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그 시절에는 개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흥청거렸던 곳이다. 바람이 잔 거문도 항은 가을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도 끄트머리에 수월산이 불끈 솟아 있다. 저산 뒤에 등대가 있을 것이다. 이제 거문도 등대를 보러 갈 참이다. 출항이 4시여서 시간은 충분했다. |
공사 전의 거문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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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인 거문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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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서도 끝자락 수월산 해벽 위에 세워진 100년의 역사를 지닌 등대일 것이다. 19세기 말 열강이 아시아 침탈을 위해 동진을 할때 러시아 남하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거문도에 다다른 영국 해군들은 천혜의 자연적인 만(灣)을 보자 군사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이곳에 닻을 내리려 했다. 이 사건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으로 번졌고 마침내 세력 개편을 끝낸 일본이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1급 등대를 설치한 것이다. 그렇게 아픈 상처를 지닌 등대는 1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서남해안을 오가는 배들을 위해 불을 밝혀 온 셈이다.
노루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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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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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와 서도를 잇는 아치형 삼호교를 건너면 서도다. 전에는 배로 건너야 했던 섬이다. 다리를 건너 바닷가를 돌아가 길은 그늘이 없어 초가을 볕에도 따갑다. 남쪽으로 노루섬 형제가 다정하게 떠 있는 모습이 정겹고 섬 뒤로 짙푸른 남해 바다가 무망으로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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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목과 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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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유림 해수욕장을 지나 장구목에 다다르면 자연이 만든 웅장한 파노라마를 만난다. 서도의 끝자락인 전수월산과 수월산 양편의 해벽 사이에는 암반이 낮게 펼쳐져 있고 찰싹거리는 바다 건너편에 선바위가 우람하게 서 있다. 나는 이 곳을 거문도 제 일경으로 친다. 수월산의 해벽과 넓은 반석들과 기묘한 바위들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곳이다. |
이 곳에서 선바위와 툭 터진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무조건적 전진과 출항의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먹는 점심이 꿀 맛 같다. 검은 바위틈에 노란 섬고들배기 꽃이 곱다. 흙 한점 없는 바위틈에서 모질게도 이어온 생명력에 감탄한다.
이곳에서 등대까지는 1.2Km로 20분 정도 걸으면 된다. 동백나무를 위시해서 후박나무, 사스레피나무, 예덕나무, 누리장나무, 돈나무, 광나무, 생달나무, 박달목서 등 난대림이 울창하다. 30년 전 이 곳을 찾았을 때 동박새를 잡으러 동맥나무 숲 사이로 숨어 다니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일본으로 수출하여 용돈을 마련하기 위함이라는데 이제는 동박새 마저도 휘귀종이 되어 버렸는지 어디서도 새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쉽다. 울창한 난대림 숲길을 간다. 숲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수월산 자락을 두들기는 하얀 포말이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동백나무들이 매 마른 채 하얀 등걸로 서 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어야 동백잎들이 병으로 시들어 떨어진 모습이 애처롭다. 손길이 미치지 못한 낙도여서 저렇게 힘들게 사나 보다. |
등대 가는 길, 난대림 수림이 울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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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등대가 반겨 줄 거란 기대감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갔지만 그립던 정경은 간데없고 흉물스런 구조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역사를 지닌 거문도등대가 개발과 편리성 때문에 크게 훼손되고 있었다. 지난날 하얀 집들과 파란 금잔디가 깔려 있던 곳은 포클레인으로 파 헤쳐 진 검붉은 흙더미만 쌓여 있었다. |
예전처럼 아름다운 정경일 거라며 가슴 한편에 새겨진 그림을 그리려던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고약하고 무지한 인간의 횡포를 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여수지방해양수산청에서는 지난해 8월부터 33억원을 들여 거문도 등대 정비사업을 벌리고 있었다. 기존 등대 옆에 9층 높이(33.4m)의 신축 등대가 들어서고 직원 숙소도 2층 규모로 짓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 밀려 난 하얀 등대의 모습이 초라하고 왜소하여 가슴이 아프다.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질감이 있는 이 구조물을 보며, 초라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던 숙소와 담장, 금잔디 밭 등 100년의 역사가 개발의 논리에 밀려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아름답고 푸른 바다를 향해 거대한 골리앗처럼 서있는 시커먼 철 구조물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인간들은 이다지도 무지하며 이다지도 횡포할 수 있다는 말인가? |
거문도등대는 더 나아갈 수 없는 수월산 해벽위에서 인근 어장에서 어로작업을 하는 어민과 서남해안을 오가는 각종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는 1급 등대였다. 또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등대를 찾아가는 산책로에는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 숲이 장관을 이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알려져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지경을 만들고 만 것이다. |
관백정 아래 배지바위-서도 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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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백정에 서서 배지바위를 두들기는 하얀 파도를 보며 30년 전 기억을 떠 올렸다. 이곳 농협에 근무하던 김주사의 안내를 받으며 찾았던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수직의 해안 절벽위로 우거진 수림과 좁을 도로와 작은 정원에 심어진 파란 금잔디와 하얀 등대 뒤로 펼쳐지는 망망대해는 한편의 꿈이고 그림이었다. 혼자 근무하던 등대지기는 외롭다며 먹을 것만 가지고 오라 했고, 나는 그러마했지만 실없는 약속일 뿐 등대지기는 나의 기억 저편으로 살아져 버렸다. 사람들을 그리워했을 등대지기가 왜 이렇게 보고 싶은 걸까? 폐결핵 요양을 하던 얼굴 빛 하얀 소녀와 주름 패인 등대지기와 동박새를 잡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30년 저편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
영국군 묘지-빨간 종이 장미가 인상적이다 |
다시 되돌아와 영국군 묘지를 찾았다. 짙푸른 동백나무와 빨간 종이 장미와 하얀 비석이 백년의 이야기를 되살리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푸른 바다를 그리며 누어있던 하얀 피부의 젊은 수병이 뚜벅거리고 걸어 나올 것 같다. 되돌아 내려오던 길가에 보았던 녹슨 함석지붕과 잡초와 허물어진 돌담을 한 빈집들을 바라보는 가슴을 아리다. |
거문초등학교를 찾았다. 번듯하게 새로 지어진 건물이 보기 좋다. 섬의 크기야 세 개 섬 중 가장 작지만 행정의 중심지여서 지금은 세 개의 분교를 거느리는 본교로 남아 있다. 연휴인데도 멀미 때문에 집엘 가지 못했다며 등대 가는 길에서 나이를 잊고 사는 여선생님의 안내로 학교도 둘러보고 차 대접도 받은 후 뱃머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서도초등학교 100주년 기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낙도에서 개교 100년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30년 전 개교 70주년일 때, 교육감님과 함께 해군 경비정을 타고 이 곳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고운 유니폼을 차려 입은 밴드부 아이들이 부두에서 환영 연주를 하는 것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파란 하늘과 옥색 바다와 빨간 아이들의 제복이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30년이 지나 올해로 100주년이 된 서도초등학교는 이제 분교장으로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서도 섬 끝에 서도 초등학교가 가물거렸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작은 학교가 저곳에 있는 것이다. 만 건너 산자락에 덕촌 초등학교가 보인다. 30년 전에 만내 4개교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거문, 동도, 서도, 덕촌 4개교가 저 곳 덕촌초등학교에 모여 종일 체육대회를 열었다. 섬마다 주민들은 통통선을 타고 와서 북과 꽹가리를 치며 목이 쉬어라 응원을 했고 해가 지면 어둠 속으로 배를 몰고 되돌아갔다. |
본도와 서도를 잇는 삼호대교와 거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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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하루를 운동장에서 뛰었었다. 비록 교육청에서 주관한 면 대표팀을 뽁기 위한 경기대회였했지만 그날은 외로운 섬마을의 최대 축제 날이었다. 저녁이면 이 뒷골목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피로를 풀었던 추억이 새롭다.
4시에 거문항을 떠난 배는 거문도와 덕촌, 동도, 서도를 차례로 지나며 외항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