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운현궁(雲峴宮) 이야기

문근영 2009. 12. 10. 11:29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한조각 구름이어라..<운현궁> 이야기

 


 

@2005@운현궁 현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518년 동안 조선왕국의 도성이었던 수도 서울에는 경복궁을 비롯한 옛 궁궐이 지금도 남아있지만 대궐이 아니면서 궁(宮)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중에 하나가 운현궁(雲峴宮)이다. 창덕궁 남쪽 종로구 운니동에 자리 잡은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쇠락하는 왕국을 지켜봤던 역사 의 현장이다.


대지 2478평에 단층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운현궁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궁궐의 내전 건물에 가까우리만큼 웅장하다. 도성의 4대문을 본떠 네곳에 출입문을 두었는데 창덕궁에 기거하던 고종이 드나들기 편리하도록 북쪽에 경근문이 있었고 대원군 전용문이던 공근문 외에 2개의 문이 더 있었다. 운현궁이란 이름은 옛 기상대인 서운관(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고개 너머에 있다하여 운현(雲峴)이라 이름 지었다.


경기도 여주에서 영의정을 지냈던 민치록의 딸로 태어나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천애의 고아가 되었던 민비가 집안의 친척이 되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어렵다는 삼간택을 통과하고 세자빈이 아닌 왕비로 최종 간택되어 열다섯 어린 나이에 한 살 아래 연하의 신랑 고종과 가례를 올렸던 곳이 운현궁이다. 또한 현직 임금이 대궐이 아닌 사저(私邸)에서 혼례식을 올렸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2005@ 운현궁 앞마당. 가마꾼은 어디가고 조용하기만 하다


대문 앞에서 운현궁을 바라보니 141년 전 그 옛날 가마꾼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슬하에 아들이 없는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왕실의 권력을 한손에 틀어쥔 조대비는 교지를 내려 운니동에 있는 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를 새 임금으로 모셔 오도록 명을 내린다. 이 모든 것은 용의주도하게 사전 정지작업을 한 대원군의 포석이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신 조대비의 명을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 김병익이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마당에 도착했을 때 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고종은 천진스러웠겠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바짓가랭이를 기어야 했던 수모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핍박을 당했던 대원군의 감회가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난 대원군 이하응은 종친부 유사당상 등 한직을 지내면서 권력의 중심부는 얼씬도 못하고 변두리를 맴돌았지만 종친이기 때문에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 이에 대원군은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안동김씨의 시선을 피하고 대낮에도 불량배와 어울려 술에 취해 주정뱅이 노릇을 하는 등 파락호로서 궁도령이라는 멸시의 칭호를 듣지만 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 장치였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던 대원군은 어느 날, 당대의 풍수가로부터 2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천하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현장을 방문해보니 그 자리는 빈터가 아니라 사찰이 있었고 명당의 혈(穴)이라 지적해준 자리에는 석탑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물러설 대원군이 아니다. 묘책을 써서 절간을 불태워버리고 석탑을 부숴버린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던 그의 부친 묘를 이장했다. 이곳이 바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 묘이다.


그로부터 7년 후 대원군은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를 낳았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른다니 감회가 어떠했을까? 아무리 상상해 봐도 당사자 대원군 아니면 모를 벅찬 감동이었을 것이다. 1과 0으로 모든 것을 구명할 수 있다는 디지털 현세에도 누구는 조상을 명당자리에 이장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누구는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명당자리에 조상의 묘를 이장했다는 소리가 들리니 풍수지리설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005@ 노안당


솟을대문을 지나니 대원군의 사랑채였다는 노안당(老安堂)이 나온다. 논어의 공야장편에 나오는 ‘노인을 편안하게 해준다(老者安之)’라는 말에서 따온 당호라니 뜻은 깊지만 권력의 부침이 심했던 대원군이 민비의 책동으로 중국 천진으로 끌려가 4년간 유폐되었다 귀국하여 칩거했던 곳이 노안당이며 갑오개혁 이후 반짝 득세했다가 일본의 야욕에 침탈당하는 조국을 바라보며 숨을 거둔 곳이 노안당인데 노인 대원군에게 과연 편안한 곳이었을까


T 자형 노안당 동쪽 끝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마루 끝에 영화루가 있다. 손님을 맞을 때 사용하던 방이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나이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서원을 철폐하고 비변사를 폐지하며 안동김씨 세력을 숙청해야 했던 대원군이었기에 정치와 권력의 중심을 이루는 방이었다.


기우는 조국을 염려하여 우국지사도 드나들었지만 국가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을 등에 업거나 러시아 또는 청나라와 결탁하여 자신의 이익과 입신양명만을 위하여 날뛰었던 매국노들도 드나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의 이권을 챙기기 위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도 드나들었을 터인데 인걸은 간데없고 먼지만 쌓여있다.

 


 

@2005@뒷마당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돌 구조물이 있다

 

 


 

@2005@집안에 비석이 있다는것이 특이했다.


군금별장 이장렴을 맞이했던 방도 바로 영화루이다. 대원군이 안동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망나니짓을 하던 젊은 시절, 색주가(色酒家) 기생 춘홍의 집을 드나들 때였다. 달라는 술값은 주지 않고 수작을 걸고 있는 대원군을 보다 못한 이장렴이 대원군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이렇게 호통을 쳤다.


“한 나라의 종친이 외상술이나 마셔야 되겠느냐? 외상 하자는 것도 꼴불견인데 돈도 없는 주제에 기생한테 수작은 개뼉다귀 같은 수작이냐?”


의도적으로 추태를 부려 장안의 웃음거리가 되고자 했던 대원군의 숨은 뜻을 알 길이 없는 이장렴은 종친의 체신으로 부적절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장렴이 기생 춘홍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어서 남자로서 투기심에 그랬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대원의 대감이 된 후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다.


“지금도 내 뺨을 칠 수 있느냐?”

라고 대원군이 묻자

 

“그 때 기생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지체가 예전의 대원군 지체가 아닌지라 군금별장의 어투는 공손하였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운현궁 대문 밖에서 부터 기어들어와 목을 늘어뜨리고 ‘죽여 주십사’하고 백배 천배 사죄해도 무사히 넘기지 못할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뺨을 후려갈길 수 있다니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하하하 장부답구려, 별장의 기백을 내가 사리다”

 

체격은 작지만 통이 큰 화통한 남자 이하응이었다. 군금별장 이장렴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정치적인 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또한 남자들끼리 있을 수 있는 색주가에서의 배꼽아래 사건을 확대 해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로부터 대원군은 군금별장에 머물러있던 이장렴을 요직에 기용하였고 이장렴은 승승장구 하였다.

 


 

@2005@ 노락당


노안당을 지나니 운현궁에서 규모가 제일 큰 집 노락당(老樂堂)이 나온다. 고종 즉위 이듬해(1865년) 노안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서 회갑 등 잔치를 행할 때 사용했으며 고종과 민비가 가례(1866년)를 올렸던 바로 그 자리이다. 고종과 민비의 가례는 평범한 혼례가 아니다. 국혼이다. 민비는 가례를 통하여 왕비로 탄생하였고 국모로 등극하였던 것이다.


왕과 왕비는 집안도 다르고 출신지역도 다르다. 왕의 결혼식은 대궐에서 거행하는 것이 불문율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조선왕실의 전통이었다. 허나 고종으로 등극한 명복이가 태어난 곳이 운현궁이며 민비가 국모로 탄생한곳이 운현궁이다. 또한 조선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팔도에서 올라온 양가집 규수들 중에서 민비가 왕비로 최종 간택되었던 장소이며 삼간택을 통과한 민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기도 하다.


마당을 바라보니 전국에서 뽑혀온 왕비 후보군 중에서 가슴 조이며 떨고 있던 여주골 시골처녀 민비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 순진했던 시골처녀 민비가 훗날 명성황후가 되어 자신의 정적으로 등장하리라 대원군인들 꿈에라도 생각했으랴. 또한 친척이기에 민씨 집안 영광이려니 생각하고 베갯머리 송사 끝에 왕비로 밀어 올렸건만 시아버지에게 비수를 겨누는 무서운 며느리로 성장하리라고는 대원군 부인 민씨도 몰랐을 것이다.


얼마 전 TV 드라마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방영되어 시청자를 놀라게 하고 국민을 경악케 하여 여론의 몰매를 맞은 일이 있다. 해당 방송사와 담담 PD는 의미를 전달하기위한 장치였다고 볼멘소리로 항변했지만 허공의 메아리였다. 현세의 드라마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러할진대 아무리 가정사와 정치는 다르다 하여도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직접 목격해야 했던 부인 민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원혼이 마당을 떠도는 것 같았다.


대원군과 민비가 대립하게 된 동기는 어떻게 보면 자그마한 일에서 출발했다. 고종과 민비가 부부로 살았지만 궁인 이씨에게서 먼저 아들이 태어났다. 완화군이 탄생한 것이다. 손자를 기다리는 대원군으로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대원군의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민비의 가슴은 찢어지는 슬픔이었다. 이때부터 대립각을 세우기l 시작한 민비는 무서운 여인으로 변해갔다. 한마디로 여자의 투기어린 독기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2005@이로당. 뒤쪽에 보이는것이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된 통로이다


노락당을 지나니 운현궁의 안채 이로당(二老堂)이 나온다. 운현궁의 안주인 부인 민씨의 거처다. 유교 이념에 천착해온 조선시대 사대부가 안방마님의 거처에 걸맞게 ㅁ자형 구조에 폐쇄적이다.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된 통로이외에는 출입구도 없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거처해야 했던 부인 민씨는 의외로 개방적이고 외향적이었다.


쇄국정책을 쓰면서 8,000여명의 천주교 신자를 학살했던 대원군과 달리 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였다. 1896년 운현궁 앞 수녀 이 마리아 집에서 세례를 받은 부인 민씨는 뮈셀 주교를 이로당에 초치하여 성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남편은 천주교 신자를 학살해야 하고 자신은 신자로서 천주교를 믿어야 했던 이율배반적인 환경. 한 남자의 아내로서 부인 민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2005@ 이로당 앞마당에 있는 우물. 실제 사용했던 우물인지 상징적인 구조물인지 알수없지만 세도가의 집이라는것을 말해주듯 화려하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는 의외로 엉뚱한 곳에 있다.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1866년 3월과 8월에 조선과의 통상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협상하기 위한 무기로서 무엇이 좋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묘를 파헤쳐 부장품과 유골을 가지고 있으면 천하의 대원군도 순순히 응해 올 것이라고 귀뜸 했다.


좋은 묘책이다 생각한 오페르트는 대원군과 흥정하기 위한 먹잇감으로 충남 예산에 있는 대원군 부친 묘를 파헤치다 미수에 그친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패착이었다. 조상을 숭배하는 조선인의 정서와 조상 묘에 대한 정성을 간과한 어리석은 서양인의 행동이었다. 그 남연군의 묘가 어떤 묘인가? 


권력을 향한 집념으로 현존하는 사찰 가야사를 폭력으로 쓸어버리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장한 천자(天子)를 둘이나 배출할 수 있다는 명당 중에 명당 남연군 묘가 아니던가.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대원군의 뇌리에는 서양 사람들은 조상을 모르는 고얀 사람들로 각인되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쇄국정책을 강화 하였고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2005@무승대. 무엇을 성하라고 빌었을까


뒤뜰로 나오니 창덕궁으로 통하는 경근문이 있었던 자리가 있고 궁궐이나 여염집에서 볼 수 없는 제단석이 눈에 띄인다. 궁궐에 있는 여인도 아닌 신분에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왕이 되는 광영을 누렸고 자신이 손수 천거하고 간택한 며느리가 명성황후가 되어 집안이 흔들릴 때 안주인  민씨는 무엇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을까?


백성위에 왕이 있고 임금위에 하늘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고 싶었을 것이다. 천주교에 귀의하여 신자가 되었지만 불어오는 정치의 세찬 바람을 견디기에는 부족하였음인지 동쪽을 향하여 정한수 떠놓고 두 손을 모았던 자리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닳아있다. 풍운아 대원군이 가는 길이 험난하였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부인 역시 고난의 길이었을 것이다.

 


 

@2005@운현궁 담장. 권세가를 말해주듯 화려하다

 

대궐 못지않게 위풍당당 권세를 자랑하던 운현궁도 조선 왕국의 몰락과 함께 퇴락하여 일제시대에는 주변에 있는 덕성여대와 교동국민학교에 터를 할양하여 쪼그라든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폐가의 위기에 몰렸으나 대원군의 5대손 이 청씨가 1991년 서울시에 양도하여 서울시가 관리하고 있다.


조선 팔도의 권력이 집중되었던 운현궁. 내 노라 하는 조선의 인물들이 발이 닳도록 드나들던 운현궁. 조선의 역사를 생산하고 확대 재생산했던 운현궁. 오늘도 운현궁에 바람이 불지만 그때의 바람이 아니었고 구름도 쉬어간다는 운현궁에 오늘도 구름이 쉬어가고 있었지만 그때의 구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