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는 여인열전] ‘세계무역 개척자’ 소현세자빈
| ||||
|
소현세자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병자호란 패전에 따른 인질로서였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면 평생 궐 밖 구경을 못하는 법이었다.
그런 대궐을 떠나 수천리 나라 밖 심양까지 갔다.
인조 15년 2월 서울을 떠난 강씨 일행이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지나 심양에 도착한 때는 4월이었다.
강씨가 도착한 곳은 심양 궁궐 근처의 심양관(瀋陽館·현재 심양시 아동도서관 자리)이었는데, 이곳은 사실상 주청 조선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직접 상대하기를 꺼리는 인조를 대신해 많은 일을 수행했다.
청나라의 파병 요구에 응하고 반청활동을 하다 끌려와 재판 받는 김상헌 같은 대신들을 보호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 소현세자 일행이 끌려갔던 중국 심양관 자리.현재는 시립아동도서관이 들어서있다.(뒤쪽 붉은 지붕 건물) |
소현세자가 이런 정치적 일에 몰두하는 동안 강씨는 심양관의 경제문제 해결이 자신의 몫이라고 판단했다.
심양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행은 192명이었는데 이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였다.
당시 심양의 남탑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적은 ‘심양장계’ 인조 15년 5월조는 속환가가 수백 또는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그녀는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인조 17년에 심양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00 냥을 보내 면포(綿布)·표범가죽(豹皮)·수달피(水獺皮)·꿀 등을 무역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청나라는 물품 부족에 시달렸다.
강씨는 청나라 지배층의 두둑한 지갑을 조선의 질 좋은 물품과 연결시키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면포·표범가죽뿐만 아니라 종이와 괴화(槐花) 등 약재와 생강도 좋은 무역품이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무역을 통해 경제에 눈을 뜨던 인조 19년(1641),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에서 농사 짓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심양관의 신하들은 농사를 짓게 되면 영원히 조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강빈의 생각은 달랐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동남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촌(魯哥村) 두 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사하보(沙河堡) 근처의 1 50일 갈이와 사을고(士乙古) 근처 중 150일 갈이를 농토로 제공했는데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였다.
강빈은 처음에는 한인(漢人)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한인들의 값은 은 25냥∼30냥이었고 소 값은 한마리에 15냥∼18냥이었다.
‘심양장계’에 따르면 인조 20년에 농사로 거둔 곡식은 3319석이나 됐다. 강빈은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 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 농군들이 더욱 열심히 일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덕에 수확물은 더욱 많아졌다.
강씨는 조선의 농법이 가미된 이 농산물을 만주 귀족들에게 팔았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무역만 하던 단일체제에서 생산과 무역을 겸하는 복합체제로 발전한 것이다.
강빈의 경영수완 덕에 인질 생활 초기 울며 호소하는 조선인들로 가득 찼던 심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인질 생활에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택이었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이제 이들 부부가 귀국해서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되면 조선은 변화할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런 강빈과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그는 강씨가 청나라와 짜고 자신을 폐한 후 소현세자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의심이 인조 21년(1643) 6월 사망한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빈소에 왕곡(往哭)까지 막게 했다.
멀리 심양에서 잠시 귀국한 며느리의 왕곡을 못하게 한 인조의 가혹한 조치는 내외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 23년(1645) 2월 9년 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다.
이때 심양관에는 4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수완을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런 경영수완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달 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인조는 재위 24년 3월 강빈을 폐출해 친정으로 쫓아냈다. ‘인조실록’은 “강빈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 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일로 사약을 내려 강빈을 죽였다.
당시 사관이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 나갔던 실용주의적 여성 경영자의 죽음이자 그녀가 만들려던 개방의 나라, 실용의 나라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
◈ 소현세자는…
소현세자(1612~1645)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난 맏아들이다.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세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그로 인해 강화가 결렬되자, 세자는 “내가 비록 잘못되어도 아들이 있으니 괜찮다”며 인질을 자처했다.
이에 따라 세자는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한 186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1637년 당시 청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
세자는 1644년 남진하는 청군을 따라 북경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Schall, J A)을 만나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을 접한 후 조선을 개방하기로 결심한다.
9년 간의 인질 생활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이방송(李邦訟) 등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궁녀를 대동하는 한편 서양의 각종 과학기구·서적들을 가져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인조 실록’에 “일곱 구멍에서 피가 나와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고 기록된 대로, 그는 귀국 두 달 만에 독살 당한다.
조선의 종법(宗法)은 장자가 죽으면, 동생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인데 인조는 세자의 장남 석철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효종)에게 뒤를 잇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석철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였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와 두 친정 오빠까지 죽였다. 자신이 소현세자 독살을 주도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덕일
'가던 길 멈추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풍의 예술 (0) | 2009.12.18 |
---|---|
한국의 정자..| (0) | 2009.12.17 |
거문도 등대의 추억... (0) | 2009.12.14 |
절대 고독을 달래주던 마음의 벗 -추사 김정희 (0) | 2009.12.10 |
운현궁(雲峴宮) 이야기 (0) | 2009.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