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짧은 시 그리고 긴 여운 / 추창호

문근영 2009. 11. 7. 21:47

짧은 시 그리고 긴 여운 / 추창호


문예지와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참으로 많은 문학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학의 위기란 말이 심심찮게 거론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쉽게 읽혀지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이 부족한 탓이다.

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5년 째 매일 시 한 편을 전 직원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반응은 가지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은 시가 어렵다는 것이다. 시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소양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그런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시를 일반 독자들이 즐겨 읽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요즘 발표되는 시의 경향 중의 하나가 산문적이고, 길이가 길며, 난해하다는 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제목에서 시사한 것처럼 '짧은 시 그리고 긴 여운'을 나에게 준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 몇 수를 내가 읽은 느낌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데 있다. 따라서 고상한 문학적인 이론과 그 이론을 바탕으로 한 평론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나의 단견과 편견도 포함되어 있음도 부언해 둔다.

몹시 추운 밤이었다
나는 커피만 거듭하고

너는 말없이 자꾸
성냥개비를 꺾기만 했다

그것이 서로의 인생의
갈림길이었구나

- 이호우의 '회상' 전문 -

운명적인 이별을 앞에 둔 연인의 미묘하고도 안타까운 마음을 이처럼 절제된 감정으로 한 폭의 그림 또는 한 편의 심리극을 보듯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를 아직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시조가 가진 절제와 함축미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마 산문으로 표현한다면 책 반 권 이상의 분량은 족히 될 수도 있었으리라. 따라서 이 짧은 시의 길이 외의 분량은 독자들의 상상의 폭에 맡겨둘 수밖에 없다.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繡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愛淸에
삼가한 듯 들렀다.

- 이영도시인의 '團欒' 전문 -

자식농사는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어렵다. 그 주요인 중의 하나가 부모 자식 간의 의사소통 부재를 들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호롱불 밑에서 이마를 맞대고 도란도란 교감의 정을 나누는 모습’은 우리에겐 감동과 부러움이다. 노래하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맛도 맛이지만 밀레의 '만종'처럼 평화스럽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머금도록 만든다. 참 소박하고 아름답다.

눈 감아도
환해 오는
기억의 무궁한 늪

숱한
사람들을
밤새껏 맞고 보내다

네 차례
네 차례에서는
한참 맘이 설렜다

- 권오신시인의 ‘네 생각’ 전문 -

우리는 무수한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나간다. 눈 감아도 환해 오는 기억의 무궁한 늪을 열면 함께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루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스쳐 지난 이런 세월 속에 아직도 한참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이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만남의 의미를 곱새겨 보게 한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이우걸시인의 ‘팽이’ 전문 -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채팽이를 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비틀대는 채팽이는 맞으면 맞을수록 팔팔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이런 단순한 팽이의 속성을 통해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을 발견해 내는 시인의 혜안이 무섭다. 이 시를 여러 잣대로 깊이 있게 해석을 하지 말자. 그냥, 살면서 힘들고 숨이 가빠올 때 이 시를 읽어보라. 불끈 솟는 오기 그리고 다시 꿈틀거리는 삶의 의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꽃은…
피는 게 아냐
그리움이
터진 거지…

내 온몸의
피가
피가
열꽃되어
터진 게야…

꽃비로
당신 적시려
혼(魂)을 활활
태운 게야…

- 이구학시인의 '꽃은...' 전문 -

꽃은 피는 것이 아니라 열꽃 같은 그리움이 터진 것이라니... 엉뚱한 생각의 발상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한 편으로는 대상을 향한 사랑이 아프기도 하지만, 새겨보면 참 아름다운 사랑이다. 우리 사는 일도 혼신의 힘을 다한 이런 사랑이면 좋겠다.

시가 길어야 좋은 시는 아니다. 고고한 위치에서 독자들을 내려다보는 시가 좋은 시일 수 없다. 짧아도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고, 상상의 폭을 넓혀줄 수 있으며, 긴 여운을 남겨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아무쪼록 이런 좋은 시들이 많이 창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시를 즐겨 읽었으면 좋겠다.

'詩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써야 하는가?  (0) 2009.11.09
올바른 詩 감상  (0) 2009.11.09
정현종과 네루다 /< 책의 바다 >에서..  (0) 2009.10.31
詩란 무엇인가?|  (0) 2009.10.29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시인 정일근]|  (0) 2009.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