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무엇을 써야 하는가?

문근영 2009. 11. 9. 13:41

무엇을 쓸 것인가 / 조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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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 것인가 ?


따지고 보면 시가 세상에 존재해 온 이래, 창작가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가장 고전적이며 근원적인 화두일 것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 이래 110년,한국의 현대문학이란 시간적 카테고리 속에서 우리는 이 골치 아픈 명제를 비상하게 고뇌하지 않으면 아니 될 기점에 이르렀다고 필자는 여러 번 이야기 하여 왔다.서정시와 반서정시의 대립과 갈등의 끝자락에 얹힌 현재의 한국시에 대한 평가도 대체로 비관적이다.따라서 건강한 창작가라면 21C 문학을 예견 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창작에 임할 수는 없을 것이나 이 문제에 대한 견해도,20C 시단의 대립 못지않게 다양하고 상반된 목소리만 무성할 뿐 명쾌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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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문제는 당연히 현재 한국시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필자는 감히, 서구문물의 쇄도와 더불어 반서정의 기치를 내 건 서양문학적 패러다임에 성급히 편승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무수한 시행착오의 병폐가 오늘의 시 현실을 부른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반동에서 태동한 서구의 모더니즘이,우리나라에는 사실주의보다 먼저 유입됨으로서,다시 말해 사실주의가 모더니즘보다 후발로 유입되므로 인해,해괴하고 슬프게도 사실주의적 문학이념이 주정시와 주지시의 모순과 한계를 모두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쯤으로 과대포장 된 점을 말함이다.

1970년대 이후,명료하고 용이한 이슈의 전달과 다수의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형 리얼리스트들이 사실주의적 표현기법을 선호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1990년대에 들어서 정치와 사회의 변혁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을 상실한 그들의 방황과 답보를 되새김과 동시에, 한국형 사실주의의 병폐인 몰개성화,하향평준화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 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리란 목소리는 너무나 지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 시단은 범대중화라는 슬로건이 불러 온, 고전문화의 본질적 왜곡과 양적 압박에 대하여 대체로 무책임 하다.

죽간을 대체한 종이에서 그 종이를 대체한 전자종이의 시대,그리고 시인 40000명! 

인터넷에 범람하는 무수한 시(?)들을 보며 독자들은 이미 그것들을‘매일 청소하기에도 급급한 쓰레기’쯤으로 여기고 있음이 자명하다.그것들을 만들어 내는 시인들을 독자들은,귀찮고 성가신 또는 무책임한 저능아로 밖에 여기지 않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시인들 뿐일 것이다.

범대중화라는 이슈와 인터넷의 단기확산이 야기한 시인과 시의 범람에 대해 무조건 비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그것들의 질에 대해서만은 누구도 우호적은 아닐 것이다.대부분이 전세기유행의 아류라고 볼 밖에 없는 퇴폐주의적 데카당스이거나,동양고전의 음풍농월이나 자연예찬의 어설픈 흉내 내기에 불과한,조악한 광대 짓거리에 필자가 개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속에서 개성의 확립과 질적 고취를 염두에 둔 소위‘엘리티즘'이나‘순수시’적 주장에 대하여,가차 없이‘반민중’혹은‘반사회’란 성급한 칼날이 내려지기 일쑤이다. 실용주의에 대한 과도한 편중은 순수과학이나 인문학의 질적 답보를 부른다는 경고를 그들이 알아들을 리 없다.오히려 질 낮은 시선 끌기의 수단으로,문학의 근원적 문제에서 벗어난 외형의 파기나 생경한 언어묘사 등,유치한 방법에 골몰해 있는 현상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단원로들의 좌담을 읽어보면,어떤 이들은 한국적 전통샤머니즘시론(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어떤 이들은 민조시등 정형시론(신세훈-시인 한국문협 이사장)어떤 이들은 역사의식에 근거한 민족주의 시론(김용오-시인 한국문협 시분과 회장)또는 생태문제 등으로 의견은 분분하다.또한 새로운 미디어와의 접목 속에서 멀티포엠 디카포엠 등의 현상에 대해서도 찬반이 양립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21C 문예사조는 20C 후반에 제시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움틀 것이다. (민용태-시인 고려대 교수)란 다소 희망적 이론과,사이버시대와 맛 물려 시인들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언어처럼 닳고 닳은,그리고 진지하지도 않은 언어를 시 속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신범순-서울대 교수)는 부정적 견해도 거의 동시에 제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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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점에서,시문학의‘세상에 대한 반동’(허혜정-시인 문학박사)이란 속성에서 기인한‘비판’의 연장선상에서‘문명비판’이라는 담론이 제기됨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우리는 싫건 좋건 이미 문명 속에 한발 더 깊숙이 들어섰으며,문명도 인간 속으로 나날이 깊게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사이버 시대의 인간가치관의 변모를 조명한 졸시(흐뭇한 컴맹 외 3편)를 포함한 자작시집을 세상에 내었으나, 어린 날 장자철학을 편식한 탓인지‘해학’이란 양념을 과도하게 뿌려,주제가 부각되지 못한 시행착오를 경험한 바 있다.그러하던 중 선배시인께서 이미‘문명비판’이란 패러다임의 신선한 구현으로,적지 않은 시편을 일찍이 세상에 내놓아 세간의 화제를 준 사실을 뒤늦게 알아내어 여기에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2002년 윤동주 문학상 수상시집인 <리모콘과 풍경 / 우당 김지향>은,초현실적 이상세계로 향한 탐색시선에서 문명을 바라보며,자연과 인간의 황폐화를 신랄하게 조명함과 아울러 퇴폐화된 인간사회 속의 인간성 회복과 그리스도적 구세관을 행간에 담아내어,21C의 전범이 될‘거대담론의 선구자’로써의 '대시인'으로 회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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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란 무엇이며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시인 스스로가 시를,그저 카타르시스란 미명 하에 개인의 스트레스 해소용 오락기구로 치부하는데 그친다면,지식과시용의 포장지에 소모하고 만다면? 또는,현실이라는 미명 하에 신변잡기를 조악하게 적어놓는 기록물에 그치고 만다면? 나아가 친대중화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들어,다분히 무지하고 다분히 변덕맞은 독자의 유치한 식성이나 저급한 취향에 굴복하고 만다면? 시인은 과연 누천년 유구한 수명과 성장을 거치며 인류문명의 첨단에서 역사를 주도하여 온 공로를 주장할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차라리 다수의 통념과 그 통념으로 인한 속박에 빠져 더욱 행복할 수 있음을 망각한 인류에게 구원의 방식과 쾌락을 선사하는 선지자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창작가는 지구상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가장 처음 꺼내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낯선,그러나 미래에는 달콤한 낙원으로 안겨 올 미개척지로,언어라는 무기를 들고 떠나는 웅혼한 전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이란?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써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