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정현종과 네루다 /< 책의 바다 >에서..

문근영 2009. 10. 31. 21:30

학교에 와보니 지난달 러시아에 주문했던 책들과 지난주 알라딘에 주문했던 책들이 한꺼번에 도착해 있다. 모두 16권이다. 복사를 맡긴 책들도 오늘 받게 되면 스무 네댓 권은 되겠다. 책으로만 치자면 흥부네가 따로 없다(해서 안팎으로 구박이다). 산악인들이 흔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저 '책이 있을 뿐'인 것을. 세월은 가도 책은 '옛날'처럼 남으리라.

 

 

 

  

 

 

 

 

 

 

 

오늘 받은 책들 가운데 제일 먼저 펼쳐본 것은 정현종 시인이 이번에 완역 출간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2007). 그리고 서가에서 찾아와 나란히 펼쳐놓은 게 이전에, 사랑의 시와 절망의 노래를 포함해 모두 21편의 시 가운데 4편만을 번역해 실었던 네루다 시선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1994)이다. 언젠가 첫번째 시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는 다른 번역 2편까지 포함해서 자세한 읽기를 시도한 바 있지만, 이번에 비교해보니 정현종 시인의 번역에도 많은 수정이 가해져 있다. 거의 '두 편의 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걸 비교해서 옮겨놓는다(색깔을 넣어 처리한 게 2007년판이다. 수정된 부분은 강조처리했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당장 여기서 실행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번역상의 수정/차이를 음미해보는 일은 '시 번역' 일반론뿐만 아니라 정현종 시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지 네루다의 이 처녀시집은 그가 열아홉살에 낸 것이다. '해설'에서 역자가 평해놓은 바에 따르면, "이 시집은 우리가 다 겪게 마련인 젊은 시절의 욕망의 혼돈, 특히 성욕이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사귐과 고독, 만남과 헤어짐 따위가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넘친다. 물론 그 소용돌이는 시라고 하는 형식을 통해서 질서를 얻은 것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 커다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52-3쪽)

 

 

 

 

 

 

 

 

 

 

 

흔히 정현종 시인은 '교감의 시인', '에로티시즘의 시인'으로도 평가받지만 대개 그가 다루는 교감과 에로티즘은 식물적인 성향이 강하다.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 '에로티시즘'에서 '네 젖가슴 잔들'이나 '네 치골의 장미들' 같은 구절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구절을 읽어보지 못했다. 네루다의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을 그가 매력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시의 '결여항'이어서 아닐까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것이 네루다가 정현종에게서 갖는 의의라고 보는 것이다). 

 

간략한 연보를 읽은 기억에 따르면 정현종 시인은 청소년 시절 카톨릭 교회에도 다닌 바 있고, 아마도 종교나 구원 같은 문제에 얽매였을 법하다. 한데 네루다의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같은 세계는 그야말로 정반대편의 세계 아닐까? 시인은 '내 여자의 육체'를 말하는 대신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를 상습적으로 읊조리곤 했을 따름이다. 그의 '품격'은 '적나라함과 솔직함'의 결여태였다...

 

0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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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 네루다(1904~73), 정현종 번역



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향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생기의 방울들,

달콤한 성적(性的) 과육,

안뜰, 건초 더미, 으슥한

집들 속에 숨어 있는 마음 설레는 방들,

지난날 속에 잠자고 있는 요들,

높은 데서, 숨겨진 창에서 바라본

야생 초록의 골짜기:

빗속에서 뒤집어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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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럽게 굴러 가슴속으로 곧장 떨어지던 물방울 키스들. 다락에 올라 어두운 세상 속으로 무한 번식하던 키스들. 속내를 듣다 놀라서 떨어뜨린 키스들. 알록달록한 키스들 가운데 여우에게 살짝 한 어린 왕자의 키스. 반짝반짝 청춘의 폴라리스에 헌정된 키스들. 새내기 청춘들아. 키스도 새내기로 풋풋 울창하게, 두려움 없이 싱싱한 야생의 것으로!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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