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文人들이 뽑은 최고의 詩>
도장골 시편 / 김신용
집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 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이,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 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태어나 14세의 나이에 부랑을 시작했다. 지하도나 대합실에서 노숙하며 매혈로
끼니를 해결했다. 더 팔 피가 없으면 걸식, 꼬지꾼, 하꼬치기, 저녁털이, 뒷밀이, 아리랑치기,
급기야 펠라티오 아리랑치기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소년원을 시작으로 해서, 감방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쯤으로 여기며 드나들었으며 재생원,
갱생원 등을 두루 섭렵하는 동안 별을 5개 달았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읽어치운 독서량은
우리 교도소 문화를 비추어볼 때 가히 기적에 가까우리만큼 방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그는 1988년
당시 무크지였던 『현대시사상』 1집에 「陽洞詩篇」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나이 사십이 넘어
시단에 등단.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내며 시단에 일대 충격을 주었으나, 출판사와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출간 두 달 만에 절판되는 곡절을 겪고, 재출간 되어(천년의시작) 호평을 받았다. 이어
두 번째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 세 번째 시집 『몽유 속을 걷다』(실천문학사)
『환상통』2005년 (천년의시작)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