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인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옴.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잔의 붉은 거울 』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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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여자 / 김혜순
칼과 칼 / 김혜순
그녀의 지휘봉 / 김혜순
환한 방들 / 김혜순
핏덩어리 시계 / 김혜순
모래 여자 /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수상시 -
칼과 칼 / 김혜순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것
-2006년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
그녀의 지휘봉 / 김혜순
사랑에 빠진 나비가 어둠 속을 날아간다
어쩌자고 잠도 안 자고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지
달도 없는 밤 강물이 입술을 달짝거리는 소리
길가의 나뭇잎들이 땅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에 잠겨 몸을 떠는 소리
강물 속에서 조약돌들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바위들의 억센 피부마다 소름이 돋는다
소프라노가 테너 위로 올라서자
관객 속에서 터지는 느닷없는 고함소리
파닥거리던 그녀의 지휘봉이 흠칫 몸을 떤다
나비 한 마리에 묶인 음악당이 밤하늘로 이륙한다
바람이 연주하는 길고 검은 피리소리
창문이 덜컹거리고 복도가 소라고둥처럼 도를 말리고
도시의 골목들이 튿어진 옷고름처럼 날리다 말고
공중에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른다
아기들 잠든 방들이 부서지고
길 잃은 바람이 뒤돌아보며 높이높이 울부짖자
자동차들마저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클라리넷과 모든 관악기가 불꽃을 길게 내뿜는다
모든 성부聲部들이 몸을 맞대고 떤다
사랑에 빠진 나비가 태풍 속을 난다
치솟아 오르다 쓰러지고 다시 쓰러지는 나비 한 마리
미쳐버린 오케스트라 공중에다 팽개친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우리 아파트 옥상까지 찾아와
투신 자살한 젊은 여자의 시신을 오래, 오래 내려다본다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고막이 풍경 속을 떠돈다
나비가 이제 그만 사랑을 검은 관 속에 가두었나
나비는 보이지 않고 느닷없이 검은 피아노가 열리고
수천만 개로 쪼개진 나비의 떨리는 살점들이
강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환한 방들 / 김혜순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동서문학 2004년 봄호>
핏덩어리 시계 / 김 혜 순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 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 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네 가슴속에 귀를 대보면
핏덩어리 시계 저 혼자 쿵쿵 뛰어가는 소리
시간 맞춰 잘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