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 리뷰> 37호 게재 존재와 형상, 둥근 언어의 집 강희안 1. 시니피앙, 숨겨진 상징의 빛 클래식 작곡가가 자신의 감각적 느낌을 표현할 때 어떤 화성에 담아낼까를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시인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종종 곤혹스러운 한계에 직면한다. 언어는 시인의 생각을 반영하며 소통하는 도구이지만, 전적으로 실상을 재현하거나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인의 감각적인 언어 구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미지를 형상이라고 한다면, 독자는 재구성된 형상을 통하여 초논리적인 문맥에 접근한다. 그러나 언어가 시인과 독자 사이를 완벽하게 직통노선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해체주의자들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며, 모든 텍스트는 열린 텍스트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불완전한 언어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변별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언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지시체라는 기호적 한계와, 다른 하나는 상황과 문맥에 따른 언어의 굴절 변형을 의미한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시니피앙(sighifiant, 記票)과 시니피에(signifie, 記義)로 나누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하여 음성적 기호를 사용한다고 전제할 때, 전자를 감각으로 지각되는 소리의 층위라 하고, 후자를 감각으로 감지될 수 없는 의미의 층위라 하여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시니피앙은 언어의 형식인 ‘표현의 말’이며, 시니피에는 언어의 내용인 ‘의미의 말’이라는 차원에서 차별화된다. 시인이 자신의 새로운 발견과 그에 따른 느낌에 따라 꾸려내는 기표인 시니피앙이 표현의 말이라면, 독자가 그것을 내적으로 수용하는 의미의 말인 기의는 시니피에인 셈이다. 하지만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1: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둘은 영원히 부유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와도 같다. 이러한 점이 시인의 상상력을 작동하는 단초나 동인이 된다는 점은 가히 역설적이다. 이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 내지 시인의 의도적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그 언어적 한계에 도전하여 불립문자를 구축하려는 무모한 존재들 아니던가. 여기에서 시인의 상상력의 촉수는 빛을 발하게 된다. 꽃으로부터 밀려오는 물결 우리는 향기로 그것을 느낀다. 우리가 그 물결을 만질 때 그것은 따뜻한 시간이 되어 파닥인다. 꽃으로부터 날아오는 엽서 우리는 꽃잎 색깔로 그것을 읽는다. 우리가 내용을 읽을 때 그것은 따뜻한 빛이 되어 팔랑인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꽃잎을 닫는 꽃은 인생人生 행로行路의 상징이다. 자연 속에 보여지는 무수한 상징들을 사람들은 단지 아름답다고만 말한다.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 아름다운 꽃이 때가 되면 땅으로 떨어져 썩어간다. 꽃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사람들은 꽃이 천국으로 가서 천국 꽃나무 가지에 다시 피어나 찬란히 빛난다고 생각한다. -김경수, 「천국으로 가는 꽃」전문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한다. 언어는 원래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나 수단으로 쓰이지만, 그보다는 언어로서의 언어가 지니는 본질적 모습의 구현체가 시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쉽게 말하면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주체로서 사물들을 명명하고 사물들을 불러 모아 하나의 의미로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용시에서 화자가 “꽃으로부터 밀려오는 물결”을 하나의 기표로 인지할 때, “향기로 그것을 느”끼는 독자(기의)와의 간극은 도저하다. 독자가 “그 물결”을 만질 때는 “시간이 되어 파닥이”고, “엽서”로 날아올 때는 “색깔로 그것을 읽는다”는 점이다. 이만큼 표현의 질감과 느낌의 표현은 상이하다는 비약적 진술의 형태로 표명된다. 그러나 이와는 역으로 화자는, 독자가 기의라는 “내용”(기의)을 읽을 때는 그것이 “따뜻한 빛”(기표)으로 현현된다는 언어의 양가적 측면을 관통하는 상상력을 선보인다. 언어는 단지 특정한 사물을 지시하거나 진위 판단이 가능한 ‘원리적 체계’(gedanke)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외에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는 ‘무엇’이다. 여기서의 ‘무엇’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꽃잎을 닫는 꽃”이나 “때가 되면 땅으로 떨어져 썩어”가는 꽃과 같이 “인생人生 행로行路의 상징”이다. ‘꽃’(기표, 생성)은 떨어지는 순간 “그것으로 끝”(기의,소멸)이지만, 다른 시인들에게는 그 꽃이 “천국 꽃나무 가지에서 다시 피어나”는 또 다른 상징으로 차용되는 시니피에의 다른 이름이다. 뚫려 있는 것이 어둠인 것들이 있다 나를 뚫고 너를 뚫고 하늘을 뚫고 바다를 뚫고 바람은, 새들은, 물고기들은 그렇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들이라는 것들의 세계는, 뚫려 있으나 어둡다 터널을 뚫는 일이 어둠을 만드는 일임을 천성산의 도롱뇽들은 알고 있었을까 속도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것들, 어둠으로 숭숭 뚫린 흙과 공기와 물들의 표정을 읽는 일이 언제부턴가 내 일처럼 느껴졌다 내 몸에는 얼마나 많은 터널이 존재할까 뚫려 있어서 어두운 것들의 역설로 인해 내 마음은 늘 불편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한 마음이 터널을 만든다 나는 사랑하면 할수록 내가 사랑한 것들이 불편하다 그들 속에 내가 그동안 무수한 터널을 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터널들로 인해서 시인이 되었다 불편했던 터널의 은유를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나는 느낀다 내 불편한 마음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것은 무수한 터널을 뚫으며 어두워지는 것들이라는 것을, 멀리 새 한 마리, 터널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박남희,「터널들」전문 해석학은 ‘헤르메스hermes’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신들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이다. 이것을 문학에 적용할 경우 텍스트란 결국 저자의 의도 및 그 의도가 형성된 맥락, 상황을 전달하는 메신저이다. 따라서 해석학이란 텍스트 해석의 방법으로서 문헌학을 비롯한 텍스트 연구 방법론으로서 일찍부터 개발되어 왔다. 해석학은 언어를 ‘명제’나 좁은 의미의 ‘기호’로 보기보다는 ‘상징(symbol)’으로 본다는 점이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 ‘현상’이란 표면화되는 것으로서 그것의 주체는 곧 존재자이다. 로고스란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의 기표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현상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담론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존재를 이해하려는 측면을 강조하는 해석학적인 담론으로 분류한다. 상기 인용시는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기에 적절한 모티프를 예거하고 있어 주목된다. 화자는 “뚫려 있는 것이 어둠인 것들이 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담론 구조를 펼쳐 보인다. 일반 명제에서 통용되는 ‘뚫려 있는 것은 환한 것들이다’는 논리 준거를 뒤집으며 해체하는 상상력의 힘을 보여준다. 나아가 “터널을 뚫는 일이 어둠을 만드는 일임을/ 천성산의 도롱뇽들은 알고 있었을까”라는 대사회적인 의문까지 제기한다. 문명의 “속도를 위해”서 자연 생태계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당면한 운명이라는 함축적인 전언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둠으로 숭숭 뚫린/ 흙과 공기와 물들의 표정을 읽는 일이/ 언제부턴가 내 일처럼 느껴졌다”는 자각에 이른다. 그렇다면 “뚫려 있어서 어두운 것들의 역설로 인해/ 내 마음은 늘 불편하다”는 해석학적 진술의 함의는 무엇일가? 여기에는 화자가 ‘사랑’이라는 기표에 의해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불편’(기의)을 야기하는 존재론적인 계기가 포함된다. 따라서 그 터널들로 인해서 ‘시인’이 되었으며, “불편했던 터널의 은유”를 알게 되었다는 각성을 수반한다. “무수한 터널을 뚫으며 어두워지는 것들”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의 당면한 ‘지금-여기’의 존재 국면을 환기하는 특성이 부가된다. 인용시는 생철학적 인지와 형이상학은 물론 존재론적 동인을 포함한다. 해석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도덕률로부터 텍스트를 개방하여 텍스트의 생체험을 다시 체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2. 시니피에, 둥그런 존재의 집
인간은 언어라는 문자 없이는 온전한 형상을 지을 수 없는 존재이다. 진여의 세계에서는 언어를 초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사유를 중시하는 이상 언어 밖에서의 논의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의 선종에서 유래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이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 경 중국의 선종에서 만들어진 말로 추정된다. 이를 말 그대로 풀어보면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자’란 다양한 각도의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난만한 언어이다. 불가라는 문맥 안에서 살펴본다면 불립문자 안의 문자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불교 경전을 가리킨다. 즉 여래의 가르침이란 말로 미루어 볼 때, 불립문자란 바로 불경의 말씀을 혁파하라는 불경스러운 의미인 셈이다. 시립미술관 1층 로비 한 켠 희고 높은 벽 위에 사다리를 세워 놓고 한 사내가 글자들을 떼어 낸다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떼어지는 글자들과 어떤 문을 열어야 할 때처럼 손끝으로 노크를 해주어야 떼어지는 글자 사이 어떤 글자들은 아주 힘이 세서 사내는 벽을 밀어내며 글자들을 잡아당기며 아슬아슬 실랑이를 벌인다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리는 말의 뼛조각 의미의 핏방울들 벽이 하얗게 텅 비고 사라진 말과 이야기의 희미한 유적만이 남았다 아이가 떨어져 쌓인 말의 무덤 위에서 ‘ㅇ’하나를 집어 들고 동글동글 동그란 웃음을 웃었다 -이은경, 「자음과 모음 사이」전문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데카르트는 사유와 존재의 당위성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술적인 어법으로 진리를 관통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생각’은 무엇이며, ‘존재’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말의 뼛조각”(시니피앙)과 “의미의 핏방울들”(시니피에)의 관계망을 인지하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유아기에는 백지 상태의 뇌에 저마다 경험의 기록을 남기는데, 그 시기엔 눈을 통해 사물을 보고 귀를 통해 소리의 감각을 저장한다. 그후 아기는 자기가 본 물건을 만져보고 차갑다, 따뜻하다, 거칠다, 포근하다, 아프다 등의 감촉을 느끼게 된다. 나아가 자기가 집은 물건을 입으로 진단하는 구순기를 거친 후에 언어를 습득하는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언어를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환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언어가 얼마나 우리에게 흡착되어 고착화하고,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는지에 대해 깨닫고 나면 언어 이전의 둥근 세계를 갈망하게 된다. 언어의 종류에는 기의와 기표와의 관계가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떼어지는 글자들”과 “손끝으로 노크를 해주어야 떼어지는 글자”가 있다.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어떤 글자들은 아주 힘이 세서” 벽을 밀어내며 “아슬아슬 실랑이를 벌”이는 완강한 이데올로기의 언어도 상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언어 이전의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가 “말의 무덤”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ㅇ’하나를 집어 들고/ 동글동글 동그란 웃음을 웃”는 광경을 목도하여 불립문자의 세계에 이르는 화자의 시선은 예리하다. 과일 가게에 갔다 조롱에 매달린 새 한 마리 샀다 횃대 넝쿨마다 그렁그렁 알이 열렸다 가늘고 뾰족한 부리 휘둘러 육즙탱글한 열매 덥석 깨물었다 달금새금한 향내가 콧구멍을 들랑날랑거렸다 길고긴 수염 타고 녹홍색 즙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고개 들어 숲의 활주로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구름 덤불 속에 뿌리 내린 둥지 알알이 공중분해되었다 허공에서 우두둑 새들이 낙하했다 비행의 날갯짓을 잃어버린 날갯죽지 빽빽이 박힌 갈색 깃털을 쭈뼛쭈뼛 곧추세웠다 뒤뚱뒤뚱 잰걸음으로 달음박질쳤다 비상의 속력은 단단한 네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새 발자귀마다 불쑥불쑥 나무가 태어났다 녹갈색 껍질의 꼬리깃들이 칼바람을 일으키며 요동쳤다 뭉텅 잘려나간 새 꽁지 비명을 삼켰다 날개치지 않았다 날개 뼛조각의 흔적은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농익은 자줏빛 검은 씨앗을 아작아작 씹었다 키위, 목울대에 걸려 키위키위 울었다 -서정민,「kiwi」전문 언어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기본 모티프는 존재론이지만, 그 이전에 존재를 이해하고 그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시적 화자는 막연하게나마 인간의 실존과 존재 이해라는 접점에서 출발하여 언어(기표)와 존재(기의)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과일가게”에 가서 ‘키위’를 사면서도 짐짓 능청스럽게 “조롱에 매달린 새 한 마리” 사는 행위와 동일화하여 실존성을 들여다본다. “뾰족한 부리 휘둘러 육즙탱글한 열매 덥썩 깨물”어 뜯으며 “숲의 활주로를 박차고 뛰어” 오르는 자유 의지는 선험적 존재론의 성격을 띤다. ‘키위’라는 시니피앙은 “횃대 넝쿨마다 그렁그렁 알이 열”리는 ‘비극적 실존성’과 “구름덤불 속에 뿌리 내린 둥지”라는 ‘선험적 의지’가 분사되는 곳에서 시니피에가 현현하는 구조이다. 인용시에서 세계와 사물은 현상학적 주관성과도 이성적 객관성과도 구분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언어와 세계는 이제 인간이 “비행의 날갯짓을 잃어버린” 현실 세계에서 바라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술된다. 화자는 현실 세계가 결코 이성적인 언어 세계가 아니라 “새 발자귀마다 불쑥불쑥 나무가 태어”나는 비현실적이고 우연적인 생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한다. “날개 뼛조각의 흔적”같이 손에 -잡히는 -존재를 위하여 화자는 언어와 존재의 간극을 제거하는 언술 구조를 표방한다. 그러나 화자는 언어와 존재의 구현체인 “자줏빛 검은 씨앗”은 존재의 부재를 확인하는 자기 방기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실존성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농익은 언어의 씨앗을 “아작아작 씹”다가 “키위”라는 실상과 대면한 듯하지만, “목울대에 걸려 키위키위 울”수밖에 없는 사실의 확인에서 비극은 배가된다. 밀화부리는 암수가 부리를 맞대 密話를 속삭인대서 붙여진 이름 그건 맛있는 말 맛있는 말 자기를 묽히어 자기에게 자기야, 자기야 세상에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달랑 자기밖에 없어서 자기를 머금어 자기에게 방울방울 떠 넣어주는 그건 맛있는 말 맛있는 말 *밀화부리: 되샛과의 새 -이안, 「말」전문 불립문자는 ‘언어 무용론’이라기보다는 ‘언어 본질론’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을 의미한다. 즉 문자, 불경을 관貫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의미를 버리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문자에 매몰되는 일을 경계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내장된다. 문자는 깨달음이나 존재가 아니라 “맛있는 말”을 깨닫는 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경종인 셈이다. 문자는 일종의 깨달음과 존재를 나타내는 허상의 기표이다. 따라서 존재와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서 “암수가 부리를 맞대 密話를 속삭”이는 과정이 선행되고, 그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었을 때 문자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언어는 존재를 명명하는 동인으로 작동한다. 현상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순수한 선험적 자아’가 아니라 현존재, 즉 거기에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세상 속에 편입되어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 부가된 개체이다. 따라서 인간은 순수 자아가 아니라 “자기를 묽히어 자기에게” 혹은 타자에게 “자기야, 자기야”라고 부르며 세상과 한 몸이 되는 언어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인에게 시는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측면보다는 존재의 언어를 파악하는 텍스트로 정의된다. 결국 인간은 “세상에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달랑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 “자기를 머금어 자기에게/ 방울방울 떠 넣어주”는 자신의 실존이 곧 ‘불안(sorge)’이라는 등식을 인정하기에 이른다는 방점이다. 이와 같은 ‘불안’을 통해 인간은 절대의 무無 앞에 서게 되며 실존적 결단을 통해 깨어 있는 인간, 본래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진리의 발견이다. 현상학적 진리란 명제와 사태의 일치가 아닌 ‘드러남’, ‘탈은폐성’을 사유의 본질로 삼는다. 시와 철학은 이 탈은폐성에 봉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생각은 한편으로 전통 사유의 주관성, 인간중심주의, 존재 망각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탈출구로서 시와 예술을 통한 ‘존재의 귀기울임’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인간은 언어의 집에서 산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언어가 살면 존재가 살고, 언어가 죽으면 인간 존재도 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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